금나라, 후금(청나라)는 우리민족의 역사이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 중심의 역사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한족이 아닌 이민족은 중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존재하면서도 한족의 이민족 말살 정책속에서 모질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것이 중국내 이민족의 역사이다.
그런데 한족우월주의와 한족중심의 역사관을 내세우고 있는 중국한족이 사실은 그들의 역사가 아닌 이민족의 역사마저도 그들의 역사의 테두리에 포함시켜 놓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서 한족중심의 역사는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중국의 상고사에 해당하는 하나라, 은나라와 그 이전의 고대역사 뿐만 아니라, 금나라, 원나라, 후금(청나라)는 한족의 역사가 아니다. 모두가 우리와 같은 민족의 시원을 가진 만주족의 역사이다. 만주족이라는 명칭조차도 한족이 그들과 구분을 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만주족의 역사마저도 한족의 역사의 범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중원 대륙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지난날 대륙에서 있었던 역사들을 모두 한족의 역사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라와 은나라를 비롯하여 그 이전의 고대역사는 둘째치고라도 금나라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후금(금나라를 계송한다는 의미)-청나라는 분명 만주족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그 나라의 시조가 신라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이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금나라는 여진족의 추장인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가 세운 나라이다. 나라이름을 金이라 칭한 것은 아골타가 신라왕족 김씨의 후손이기 때문으로 김씨의 나라라 하여 금이라 하였던 것이다. 일설에는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 금이 많이 산출되는 지역이라 하여 금나라라 하였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금나라를 비하시키기 위한 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진다. 금나라는 신라가 망하면서 고려에 투항하지 않고 신라의 재건을 꿈꾸며 만주로 올라간 신라의 왕족이 세운 나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에 남아있는 역사서에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도 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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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때 편찬된 금왕조의 정사(正史)인 금사(金史)에는
(‘金史’ 本紀第1, 世紀)
金之始祖 諱函普 初從高麗來
“금의 시조는 휘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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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년에 포로가 된 송나라 황제 흠종(欽宗)의 귀환을 위해 교섭하기 위해 파견된 홍호가 지은 견문록인 송막기문(松漠記聞)에는
女眞酋長 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라고 불렀는데, 완안은 한언(중국어)의 왕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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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우문무소(宇文懋昭)가 금나라의 풍속과 제도 등을 기록한 금지(金志)에는
其初酋長 本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그 처음 추장은 본래 신라인이고 완안씨라고 불렀는데, 완안은 한언의 왕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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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료는 모두 원나라 이전의 역사적인 기록 들이다. 그런데 위의 사료들에서 고려와 신라가 병행되어 쓰이긴 하였으나,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나 고려에서 넘어가 금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금나라가 세워진 당시에 이미 한반도에는 고려가 건국되어 있던 시기이므로, 고려에서 왔다고 표기한 것은 당시에 신라가 있던 땅에 고려가 세워져 있으므로 그 나라를 명시한 것이고, 신라라고 표기한 것은 신라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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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의 병행사용에 대해서도 후금後金(청나라)의 여진족 왕조인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의 청(淸)나라 건륭(乾隆) 43년 1778년에 황명(皇命)으로 펴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고려인’ 과 ‘신라인’ 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고려와 신라의 영토가 비슷하기 때문에 두 나라의 호칭이 분별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金之始祖 諱哈富[舊作函普] 初從高麗來 [按通考乃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考新羅與高麗舊地相錯 遼金史中 往往二國呼稱 不爲分別]
“금의 시조는 휘가 합부[예적에는 함보라고 함]이고 처음에는 고려로부터 왔다. [통고와 대금국지를 살펴보건데, 모두 이르기를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데 신라와 고려의 옛땅이 섞여 있어 요와 금의 역사 중에서 왕왕 두나라의 호칭이 분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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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8권 ]
예종 문효대왕 을미10년(1115)
“생여진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황제라 칭호하고 이름을 민(旻)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거주하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끈을 매어 약속하였다. 그 지방에 돼지ㆍ양ㆍ소ㆍ말이 많고, 말은 준마가 많았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아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을 달리고 전투를 연습하여 강병이 되는데, 여러 부락이 제각기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 지방이 서쪽은 바로 거란이요, 남쪽은 바로 우리나라 땅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겼는데, 조회하러 올 때마다 부스러기 금ㆍ담비가죽ㆍ좋은 말을 폐백으로 삼았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은과 폐백을 후히 주어 해마다 그렇게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 지금 황해도의 평산)의 중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하며 고을(古乙)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劾里鉢), 막내아들을 영가(盈歌)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웅호걸스러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1권]
황해도 평사도호부편
금준(今俊) :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 평주(平州)의 중 금준이 도망하여 여진(女眞)으로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金) 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한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 중 금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여진에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이라 하였는데, 금나라 시조 아골타(阿骨打)가 그의 후손이다.” 한다.
○ 《금사(金史)》를 보면, “금 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 고려에서 올 때 나이 벌써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고 따르려 하지 않으니 아우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함보가 완안부(完顔部)의 복알수(僕斡水) 물가에 살면서, 나이 60세가 되도록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에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가 오로(烏魯)이고 다음이 알로(斡魯)였는데 드디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금 나라의 선조가 고려 사람인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 다만 금준이나 극수 중 누가 저 《금사》에서 말한 함보인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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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서 뿐만이 아니라 청나라 황실의 성씨가 애신각라(愛新覺羅)씨라는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溥儀)도 성을 붙여서 부르면 애신각라부의(愛新覺羅溥儀)가 된다. 그런데 애신각라에서 신자를 뒤로 돌려 풀이를 해보면 애각신라(愛覺新羅)가 되어 신라를 사랑하고 깨달으라는 뜻이 된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또 한 가지가 있다. 애신각라를 만주어로 읽게 되면 ‘아이신지로’ 라고 읽게 되는데, ‘아이신’ 은 만주어로 금(金)이라는 뜻이 되고 ‘지로’ 는 겨레나 성(姓)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뜻을 합하면 김성(金姓)이라는 글자 뜻풀이가 나온다. 역사적인 기록과 함께 살펴볼 때 이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에 남아있는 사서에는 금나라와 후금(청나라)이 한족의 역사가 아니고 우리민족의 역사임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사서에는 간략한 소개만이 있기는 하지만 금나라의 시조가 우리민족임에는 분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금나라, 청나라 약 300여년 동안 우리민족이 중원대륙을 차지하고 한족은 물론 대륙내의 수십개에 이르는 소수민족까지도 통치하고 지배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가 아닌 중국한족의 역사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마저도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로 편입시켜 자국의 역사화 하려 있다. 우리도 중국의 상고사(하나라와 은나라를 비롯한 그 이전의 고대국가의 역사)는 좀더 역사적인 고증을 찾아내어 우리 민족의 역사로 편입을 시키더라도 금나라와 청나라는 지금부터 충분한 역사적인 사료들을 바탕으로 우리민족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현재 중국은 청나라를 마지막으로 다시 세워진 나라이다. 지금의 중국은 한족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들이 대부분일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청나라가 오랜 세월 중국한족을 지배하며 한족과 융화정책을 쓰면서 화합을 도모해 왔기 때문에 순수한 한족은 아주 드문 일일 것이다. 현재 중국의 지배층의 상당수도 사실은 무늬만 한족이라고 내세울 뿐 청나라 만주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일국의 역사를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라고 본다면 현재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지만, 고구려는 현재 중국의 선조의 역사라고 다시 쓰여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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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학회
2006.09.20 12:48
지금 중국의 한족은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한반도의 역사까지 송두리채 도적질을 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금나라, 청나라의 역사는 물론 그 영토까지도 반드시 되착아야 한다. 대륙남쪽 변방의 오랑캐에 불과했던 지나족(한족)에게 역사를 도적질 당하고 영토까지 내준 채 지금처럼 안주하고 있을 수는 없다. 반드시 되찾아 지나족을 대륙의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다시는 중원을 넘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현도학회
2006.09.20 14:24
우리가 대륙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에 일조한 것이 해방이후 등장한 한글 전용론이다. 편협한 반도사관에 사로잡힌 한글 전용론자들에 의해 한글만이 우리민족이 창제한 문자이고 한문은 한족 고유의 문자라고 잘못 인식됨으로써 은나라 이전의 역사는 물론 그 이후 대륙에서의 일어났던 우리민족의 역사를 한족의 역사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문은 우리민족의 시원과 함께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수천 년간 함께해온 고유의 문자이다. 환웅시대 신지씨에 의해 최초의 상형문자가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동안 발전하여 지금의 형태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한글 전용론을 주장하여 한문을 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고대역사는 물론 대륙에서의 역사를 스스로 포기하고 이 반도안에 영원히 눌러앉자는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대륙의 역사를 되찾고 더 나아가 영토까지 수복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의 문화이었던 한문을 제대로 인식할 때만이 가능하다. 또한 한자의 무한한 의미와 사용하기 편리한 한글을 병행할 때 한글도 더욱 활용성이 높아지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
현도학회
2006.09.22 10:10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차지한 주(周)나라(BC1046년) 이후 한족(漢族)이 대륙을 통치한 시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륙에서 한족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진(秦)나라의 진시황도 우리와 동일한 민족의 후손이며, 북송(北宋)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본래 그들의 본거지인 대륙의 변방으로 몰아냈던 금(金)나라도, 그 뒤를 이은 원(元)나라도 한족이 아닌 우리와 동일한 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
심지어 금나라, 원나라 이후 한족이 대륙에서의 지배권을 다시 되찾았다고 하는 명(明)나라조차도 통치자는 한족이 아닌 고려인(高麗人)의 후손 주원장이다. 그 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져 대륙에서의 마지막 왕조가 된 청(淸)나라 역시 한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닌 금(金)나라의 맥(脈)을 이은 후금(後金)으로 우리민족이 대륙에서 가장 번성기를 맞은 시기였다.
이처럼 은나라의 멸망 이후 한족의 운(運)이 융성하기는 하였지만, 우리민족은 그 후에도 대륙에서 줄기차게 일어나 근 천년의 세월 동안 중원을 차지하고 한족을 지배해왔던 것이다.
지금 중국의 영토도 대륙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의 영토로 대외적으로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으로부터 우리가 반드시 수복(收復)해야 될 땅이며, 한족은 금나라 때처럼 원래 그들의 본거지인 남쪽 지방으로 모두 돌려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