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정권교체기의 일이다. 어느 날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술렁거렸다. 외화가 대규모로 유출된 것이 확실하며, 이것이 외환위기를 일으킨 결정적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인수위는 그 범인만 잡으면 폭발 직전이던 국민감정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우리 경제의 기초는 양호한 편이었다. 잠재성장률은 비교적 높았고, 재정 또한 튼튼한 축에 들었다. 외환위기 이전의 국제적인 평가도 나쁘지 않았으며, 1996년 국제수지 적자가 230억 달러에 달했지만 전년도보다 1/3분까지 줄었고, 외자도입 또한 비교적 순조로웠기 때문에 누구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을 것이라고는 판단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997년의 외환위기는 누군가 외환을 해외로 빼돌린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1997년 경상수지는 82억 달러 적자였고 자본수지는 13억 달러 흑자였으므로, 외환보유고는 69억 달러만 줄어야 했다(82-13=69). 그러나 실제로는 그 두 배에 가까운 128억 달러가 줄었다. 적어도 59억 달러가 연기처럼 사라진 셈이다. 1996년 자본수지는 24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는데, 대부분 외국으로부터의 차입이어서 이것까지 합산하면 300억 달러가 사라진 셈이다. 인수위원회가 술렁거릴 만했다.
우리나라 국제수지는 1994년부터 급속히 악화됐고, 이때부터 환율도 자연스럽게 올라야 했다. 그래야 국제수지를 호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환율을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한 해 국제수지 적자가 230억 달러로 치솟아 외환보유고와 거의 맞먹던 1996년에도 원화가치는 4.2% 떨어지는 데 그쳤다.
예를 들어, 환율이 800원일 때 10억 달러를 팔았다가 환율이 1000원으로 올랐을 때 다시 산다면 8억 달러밖에 살 수 없다. 원화 규모는 같은데 외환보유고는 2억 달러가 순식간에 준 것이다. 이런 거래가 반복되다 보면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들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외환을 누군가가 해외로 도피시킨 것이 아니라, 환율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보유 외환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이다. 인수위에서 벌어진 소동은 YS정권의 환율정책 실패로 인한 손실을 감안하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현정부는 지난날의 환율정책 실패로 인해 국가경제의 파산에 대해 통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에는 이처럼 ‘환율상승’을 방어하다가 외환보유고를 소진했다면, 이제는 ‘환율하락’을 방어하느라 원화 자산을 소진, 국가 부채를 누적시키고 있다. 즉 과거와는 정반대의 정책으로 인한 외환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사용해야 할 외국환평형기금은 거의 바닥난 상태이다.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 환율방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지만, 이것으로는 모자라 스와프 거래를 통해 국민연금까지 끌어다 쓴 실정이다. 심지어 도박성이 매우 강해 한순간에 거래액의 수십 배 내지 수백 배의 손실을 불러올 수 있는 NDF 거래(차액선물환거래)까지 동원했다. 이 때문에 현 정부에서는 환율정책을 아예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정책 당국의 무모함이 YS정부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2의 외환위기’가 오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책 당국이 달러를 비싼 값에 사들인 뒤에 싼 값에 되파는 것을 반복해 국가경제에 큰 손실을 입힌 것이다. 지금도 이 같은 환율방어는 계속되고 있으며, 손실액도 쌓여가고 있다. 정책 당국자들은 이것을 ‘실현되지 않은 평가손실’인 것처럼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만 평가손실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외환위기 이후에 누적된 외환보유고의 평가손실은 약 37조원에 이른다. 외환위기 이후에 사들인 외환보유고의 원화가치는 240조원, 지난해말 환율로 환산한 원화가치는 약 203조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240조원-203조원=37조원).
지금도 국제수지는 대규모 흑자를 기록해 환율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에 따라 평가손실 규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엄청난 재정·금융 손실액을 국가경제 발전에 사용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기회를 과다한 외환보유가 빼앗고 있는 것이다.
(자료출처:최용식 21세기경제연구소 자료)
따라서 경제규모에 맞는 적정한 외환보유고를 유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환율정책은 균형을 이루고 일정하게 움직일 때 의미가 있다. 다만 외화보유고가 과대하거나 과소일 때 환율은 변동한다. 정부정책은 일정한 환율을 유지하여야 하며 움직일 때는 점진적인 변화로 모든 이해관계자가 이를 예측하게 함으로써 실물경제가 수용하여 혼란을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경제는 급격한 원화가치의 상승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 환율이 급격히 변한다면 유가상승까지 겹쳐 수출기업들은 대부분 상당한 타격을 받고 도산할 가능성이 매우 크며, 환율을 방어과정에서 YS정권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정부에서는 과도한 외환보유로 인한 환율하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과거 일본이 사용하던 방법대로 해외부동산의 취득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은 과도한 외환보유를 해소하기 위해 해외에 사놓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상당한 손실을 입은 바가 있다. 지금 우리정부가 환율하락에 대처하기 위해 내놓고 있는 해외부동산 취득허용도 일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해외부동산 가격의 하락이라는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는 우리나라와 같이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로서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원자재(원유, 가스 등)를 해외에 미리 확보해두는 방안 등과 같은 정책으로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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