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선생님의 글에 일리가 있다고 보이나 자세히 보면 혹 그렇지 않을수도 있겠습니다.
봉우선생님께서 이순신을 말씀 하실때 이선달 이라고 칭한 적이 있으므로, 이는 이순신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시기를 지칭한다고 보여집니다. 선달이란 조선시대에 무과에 급제하고 곧바로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고 대기중이던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무과급제를 전후한 시기에 구봉선생이나 율곡선생을 만났다고 추측해 볼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보자면 이순신은 1576년 2월에 무과에 급제했고 동년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됬습니다. 근 1년의 선달생활을 한것입니다.
이순신이 '율곡선생이 전상(銓相)으로 있는 한 만나지 않겠다'고 한것은 달리 해석해 볼수 있습니다. 전상이란 조선왕조의 인사제청권을 가진 수반으로 이조판서에 해당합니다. 이순신이 관직에 있는데 그 인사권한을 행사 할수 있는 이조판서를 사사로이 만난다는 것은 당시의 동,서인 대립의 정쟁구도상 상당히 조심스럽지 않았겠냐는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다르게는 인사권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이순신의 청렴결백함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봉우선생님 말씀에, 구봉선생이 자택 사랑채에서 이선달을 만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두분의 교류가 구봉선생이 도피중이 아닌 정상적인 생활을 하실때 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벽오선생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를수 있습니다. 도피중인 사람이 큰 일을 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이나 1586년 이전 이라면 가세가 흥성했던 집안이므로 충분히 교류가 가능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태종조에 거북선이 기록된 것은 사실이나 그 거북선이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과 반드시 일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후대의 실록에는 어떤 기록도 없으니까요. 세종조에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나 거북선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태종의 아들 세종이 아버지대에 있었던 뛰어난 함선을 실전에서 방치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또한 잠수함기능은 현실화 되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나 그 또한 구봉선생의 아이디어 작품이었을 뿐 당대의 기술력이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한번쯤 이렇게 생각해 볼수도 있지 않겠나 해서 말씀 드린 거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른 말씀들은 제가 관여 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