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 권태훈 옹이 말하기를
“송구봉 선생이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현재의 잠수함 기능까지 다 갖춘 것이었다. 이율곡 선생이 당시 억세고 드센 성격의 이선달(이순신)을 발굴하여 송구봉 선생께 소개한 바, 단 한번 뵙는 순간 굴복하였다.” 라고 했다고 어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봉우의 이러한 언급이 그가 현상으로 보고 말한 것이든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든 반드시 논리적으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에 의해서 봉우의 곁에서 그의 강의를 많이 접하고 그에 대한 많은 신뢰를 가지고 추종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순신이 구봉의 제자로 잘못 인식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율곡을 통해 구봉을 만나서 그의 제자가 되었을까?
이순신이 구봉을 통하여 병법이나 전술을 배웠다면 그가 관직에 진출하기 이전이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충무공 전서 9권의 부록으로 있는 행록에는 선조15년(1582)에 당시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이 류성룡을 통하여 이순신을 만나고자 했으나, 이순신은 “나와 율곡이 동성(同姓)인 까닭에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상(銓相)으로 있는 한 만나지 않겠다.”고 하여 끝내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순신은 이전에는 율곡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봉우 권태훈의 언급대로 율곡을 통하여 구봉을 만난 적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선조15년(1582) 이후에는 이순신은 주로 북방에서 선조21(1588)까지 관직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율곡은 선조 17년(1584년) 정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구봉은 선조19년(1586)부터는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동인과 조선에 혈원의 한을 품은 채 안씨가의 복수를 피해서 도망 다니며 기축옥사를 꾸미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관직생활 중에 짬을 내어 병법이나 거북선에 대한 지식을 구봉으로부터 배우고자 했다고 해도 구봉이 가르칠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도 당시에는 당파싸움이 극렬했던 시기로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는 서인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며, 이순신은 그의 오랜 벗이기도 한 동인의 류성룡이 이끌어 주고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이순신이 서인의 구봉 송익필을 그의 스승으로 두고 자문을 구했다거나 지도를 받았다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봉우 권태훈 옹이 "이순신을 율곡이 구봉에게 소개했다" 고 한 언급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건조에 대해서도 봉우 권태훈 옹의 말처럼 구봉이 만들고 그때부터 전해진 것일까?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2월5일(갑인)의 기록에는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하는 기록이 있으며,
태종 15년 7월16일(신해)에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병비(兵備)에 대한 사의(事宜)를 올린 내용 중에 “여섯째는,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하는 기록이 있다.
실록의 이러한 기록은 선조임금 이전에 태종 임금 때에도 거북선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성능이 점차 개선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수군이 없어졌다 생겨나지 않은 이상 군사장비로서의 거북선이 계속 존재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이순신이 전투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좀더 개선하여 다시 만들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공로마저도 구봉 송익필에게 돌린다는 것은 이순신의 능력과 재능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또한 이순신이 거북선을 건조한 시기도 선조24년(1591)에서 선조25년(1592)으로 선조19(1586)년부터 도망자가 된 구봉이 거북선을 만드는 것을 지휘했다거나 도와주었거나 힌트를 주었다고 보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
그런데 거북선이 잠수기능까지 갖추었다고 한 것은 더욱 신빙성이 없다. 구봉이 도학에 뛰어나 미래에 나올 잠수함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들 당시의 거북선이나 배를 모두 나무로 건조하고 방수를 위해서는 횟가루와 나무껍질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여러 개의 화포구멍과 노가 밖으로 빠져 있는 구멍을 가지고 있고 머리가 들락거리는 구조를 가진 거북선을 가라앉았다 떴다 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거북선의 등판에 쇠판과 쇠못을 박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부분은 나무로 건조된 목선이었다.
임진왜란의 해전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선수군의 훈련장면을 묘사한 그림의 어디에도 거북선의 전투장면은 물에 떠다니는 모습일 뿐, 잠수함으로 묘사된 것은 없으며 야사의 기록이나 난중일기, 임진장초(이순신이 왕에게 올린 보고서), 실록 어디에도 거북선이 잠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토록 혁신적인 장비였다면 이순신 자신이 쓴 난중일기나 임진장초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이후에 기록된 거북선에 대한 자료 어디에도 잠수기능에 대한 것은 없다. 임란당시 잠수기능까지 구비하였다면 이후에는 더더욱 개선되고 발전되었을 것이다.
결국 봉우 권태훈 옹의 거북선과 이순신에 대한 언급은 임진왜란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을 구봉의 제자로 붙임으로써 이순신의 공을 기축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 원흉인 구봉 송익필에게로 돌리고자 봉우 권태훈 옹이 꾸며낸 말이라고 밖에는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봉우 권태훈 옹은 스스로 밝혔듯이 전삼생의 운곡 송한필의 후신이다.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은 노비의 신분으로써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초토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전범이나 다름없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운곡 송한필의 후신으로 온 봉우 권태훈 옹이 거북선을 구봉의 공으로 돌리고 이순신을 구봉의 제자로 끌어다 붙인 것은 가히 그의 삼생전의 신분과 성정(性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이충무공전서
KBS 역사스페셜 제015회 “거북선 머리는 들락거렸다”
난중일기, 임진장초
경남 통영의 충렬사에 보관되어 있는 “삼도수군훈련전진도”
이덕홍의 간재집
신석우의 해장집
민족문화추진회 웹사이트
“송구봉 선생이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현재의 잠수함 기능까지 다 갖춘 것이었다. 이율곡 선생이 당시 억세고 드센 성격의 이선달(이순신)을 발굴하여 송구봉 선생께 소개한 바, 단 한번 뵙는 순간 굴복하였다.” 라고 했다고 어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봉우의 이러한 언급이 그가 현상으로 보고 말한 것이든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든 반드시 논리적으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에 의해서 봉우의 곁에서 그의 강의를 많이 접하고 그에 대한 많은 신뢰를 가지고 추종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순신이 구봉의 제자로 잘못 인식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율곡을 통해 구봉을 만나서 그의 제자가 되었을까?
이순신이 구봉을 통하여 병법이나 전술을 배웠다면 그가 관직에 진출하기 이전이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충무공 전서 9권의 부록으로 있는 행록에는 선조15년(1582)에 당시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이 류성룡을 통하여 이순신을 만나고자 했으나, 이순신은 “나와 율곡이 동성(同姓)인 까닭에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상(銓相)으로 있는 한 만나지 않겠다.”고 하여 끝내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순신은 이전에는 율곡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봉우 권태훈의 언급대로 율곡을 통하여 구봉을 만난 적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선조15년(1582) 이후에는 이순신은 주로 북방에서 선조21(1588)까지 관직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율곡은 선조 17년(1584년) 정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구봉은 선조19년(1586)부터는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동인과 조선에 혈원의 한을 품은 채 안씨가의 복수를 피해서 도망 다니며 기축옥사를 꾸미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관직생활 중에 짬을 내어 병법이나 거북선에 대한 지식을 구봉으로부터 배우고자 했다고 해도 구봉이 가르칠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도 당시에는 당파싸움이 극렬했던 시기로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는 서인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며, 이순신은 그의 오랜 벗이기도 한 동인의 류성룡이 이끌어 주고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이순신이 서인의 구봉 송익필을 그의 스승으로 두고 자문을 구했다거나 지도를 받았다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봉우 권태훈 옹이 "이순신을 율곡이 구봉에게 소개했다" 고 한 언급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건조에 대해서도 봉우 권태훈 옹의 말처럼 구봉이 만들고 그때부터 전해진 것일까?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2월5일(갑인)의 기록에는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하는 기록이 있으며,
태종 15년 7월16일(신해)에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병비(兵備)에 대한 사의(事宜)를 올린 내용 중에 “여섯째는,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하는 기록이 있다.
실록의 이러한 기록은 선조임금 이전에 태종 임금 때에도 거북선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성능이 점차 개선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수군이 없어졌다 생겨나지 않은 이상 군사장비로서의 거북선이 계속 존재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이순신이 전투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좀더 개선하여 다시 만들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공로마저도 구봉 송익필에게 돌린다는 것은 이순신의 능력과 재능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또한 이순신이 거북선을 건조한 시기도 선조24년(1591)에서 선조25년(1592)으로 선조19(1586)년부터 도망자가 된 구봉이 거북선을 만드는 것을 지휘했다거나 도와주었거나 힌트를 주었다고 보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
그런데 거북선이 잠수기능까지 갖추었다고 한 것은 더욱 신빙성이 없다. 구봉이 도학에 뛰어나 미래에 나올 잠수함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들 당시의 거북선이나 배를 모두 나무로 건조하고 방수를 위해서는 횟가루와 나무껍질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여러 개의 화포구멍과 노가 밖으로 빠져 있는 구멍을 가지고 있고 머리가 들락거리는 구조를 가진 거북선을 가라앉았다 떴다 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거북선의 등판에 쇠판과 쇠못을 박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부분은 나무로 건조된 목선이었다.
임진왜란의 해전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선수군의 훈련장면을 묘사한 그림의 어디에도 거북선의 전투장면은 물에 떠다니는 모습일 뿐, 잠수함으로 묘사된 것은 없으며 야사의 기록이나 난중일기, 임진장초(이순신이 왕에게 올린 보고서), 실록 어디에도 거북선이 잠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토록 혁신적인 장비였다면 이순신 자신이 쓴 난중일기나 임진장초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이후에 기록된 거북선에 대한 자료 어디에도 잠수기능에 대한 것은 없다. 임란당시 잠수기능까지 구비하였다면 이후에는 더더욱 개선되고 발전되었을 것이다.
결국 봉우 권태훈 옹의 거북선과 이순신에 대한 언급은 임진왜란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을 구봉의 제자로 붙임으로써 이순신의 공을 기축옥사를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든 원흉인 구봉 송익필에게로 돌리고자 봉우 권태훈 옹이 꾸며낸 말이라고 밖에는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봉우 권태훈 옹은 스스로 밝혔듯이 전삼생의 운곡 송한필의 후신이다.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은 노비의 신분으로써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초토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전범이나 다름없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운곡 송한필의 후신으로 온 봉우 권태훈 옹이 거북선을 구봉의 공으로 돌리고 이순신을 구봉의 제자로 끌어다 붙인 것은 가히 그의 삼생전의 신분과 성정(性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참고]
조선왕조실록
이충무공전서
KBS 역사스페셜 제015회 “거북선 머리는 들락거렸다”
난중일기, 임진장초
경남 통영의 충렬사에 보관되어 있는 “삼도수군훈련전진도”
이덕홍의 간재집
신석우의 해장집
민족문화추진회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