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인연이라는 것이 윤회(輪廻)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인연이라는 용어는 본래 선가(仙家)에서 유래된 말로 수행자들이 도(道)를 얻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한 말 중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그 이치에 관계없이 생활 속에서 은연중에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윤회(輪廻)라는 것이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는 없다고 하여 인연이 종교에 따라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理致)이다.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도(道)를 얻어 이러한 윤회의 이치를 깨달은 이가 없어서 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종교에 따른 차등이 있을 뿐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전생(前生)의 악업(惡業)이나 선업(善業)에 따라 이생에서 이어진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인연이 연인, 친구, 형제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부모 자식이 되어 올 수도 있으며,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만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전생의 선업에 의해서 이어져 이생에서 인연으로 만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악업에 의해 이생에서 만나기도 한다. 선업으로 이생에서 인연이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악업으로 이생에서 만나게 됐다면 반드시 그 악업을 갚는 관계가 된다. 그 관계가 부모자식이나 연인 친구처럼 밀접한 관계로 나타나 본인들은 정작 그것을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어느 순간 그 업(業)을 갚게 되는 것이다.
주역(周易) 곤괘(坤卦)의 내용 중에 인연(因緣)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신시기군 자시기부 비일조일석지고
其所由來者 漸矣 由辯之不早辯也
기소유래자 점의 유변지부조변야
易曰履霜堅氷至 蓋言順也 (順:愼)
역왈리상견빙지 개언순야
[번역]
선(善)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慶事)가 있고, 악업(惡業)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災殃)이 따른다. 신하(臣下)가 그 군주(君主)를 살해(殺害)하고, 자식이 그 부모를 죽이는 일은 하루아침 하루 저녁의 연고(緣故)가 아니다.
그 유래는 오래 전부터 쌓여온 것이니, 분별하여야 할 때 일찍이 분별하지 못한 데에 유래가 있다. 역(易)에 이르기를 서리도 밟으면 마침내 얼음에 이르게 되니, 모든 일은 신중하게 순리(順理)를 따라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따라 진행되며, 그 원인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쌓인 업(業)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말하고자 하는 문장으로, 인연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한 문장이다.
이러한 인연의 이치에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선업(善業)에 의한 좋은 인연은 제외하고라도 악업(惡業)에 의한 인연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도록 하겠다.
아주 어려운 중병에 든 환자의 이야기로 그 환자의 자식은 부모를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 구해다 먹이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 중에 주변에서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환자의 병에도 좋은 것으로 알고 먹여 결국에는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이 이생에서 서로 인지(認知)하지는 못하지만, 전생의 업을 인연에 따라 갚은 결과가 된 것이다. 자식된 도리로 잘 해드린다고 한 것이 도리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즉 ‘악업을 갚는다’는 것이 마음먹고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위와 비슷한 경우로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이 사람의 경우도 환자였는데 다행히 운이 좋았던지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얻어 치료를 잘 받고 있었다. 그런데 환자의 자식은 조금이라도 빨리 쾌차하도록 하기위해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이것저것 구해다 먹였다. 그 중에 환자에게는 물론 일반인조차도 견디기 힘든 것을 남이 좋다고 하는 말만 믿고 먹여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평상시에는 그런 것을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힘든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지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다른 것을 먹였다는 사실조차도 숨기고 병세가 악화된 후에는 원인을 도리어 다른 곳에 돌리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면, 이 경우도 치료가 어려운 병에 걸린 환자로 본래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자식은 학교에 다니고, 부인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환자가 거동하고 움직이는데 불편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이 운이 좋아 치료법과 처방을 얻어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어느 날 시골에 살던 환자의 형님이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도 할 겸 시골에 와서 있으라고 권유했다. 환자는 듣고 보니 학교 다니는 자식이나 직장 다니는 부인에게 걱정과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가족과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형님집에 가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환자의 가족들은 안부도 물을 겸 하루에 한 번씩 환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환자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병세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못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만을 주고 받았다. 환자도 또한 자식이나 부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병세 대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자에 대한 병세가 전혀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고, 환자 가족들은 형님집에서 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만 있었는데, 어느 날 위중하다는 소식이 왔다. 알고 보니 같은 핏줄의 형제지간이긴 하지만 내 집만큼 편하지도 않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는 하지만 형제지간에도 부담감이 들어 말할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가족에게는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말하지 못하고, 형님에게도 부담이 되서 필요한 것을 말하지 못하여 환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은 점점 부실해져 간 것이다.
간혹 환자의 형님집에서는 주변에서 몸에 좋다는 것을 구하여 환자에게 나쁜지 좋은 지도 모른 채 복용시키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몸이 부실해진 상태에서 이것이 사용하고 있던 약의 효능을 무력화시키고 있었고, 심적인 부담과 마음고생이 가중되어 병세는 더욱 악화 되었던 것이다.
또한, 환자의 병세가 지속적으로 파악이 되어야 올바른 치료를 할 것인데, 환자를 배려한다는 가족들이 마음이 이것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중하다는 소식에 환자에게 갔을 때는 이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에는 한(恨)을 품은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환자의 가족이나 형님은 해줄 것은 다해줬다고 하며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것이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업(業)의 인연에 따라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져 환자도 자신이 죽음의 길을 간 것이고, 환자의 가족이나 형님에 의해서도 또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이 사람의 경우도 중병에 걸린 사람으로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는 수술을 권유 받았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그 병을 수술하고 회복된 경우가 거의 드물다는 것을 알고 수술을 한사코 만류 하였다. 환자의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만 태우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외국에 있던 사위가 우연히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위라는 사람은 여러 유명 병원에 의사들과 친분이 있으니 자신이 나서서 그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수술하면 문제없다고 자신있게 장담하였다.
별다른 대책이 없던 터라 환자의 가족들은 이 말에 이끌려 결국 환자를 수술하게 되었다. 그 후 수술 이전의 상태는커녕 환자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확실하게 회복불능으로 만들어 심적 육체적 고통을 더욱 가중시켜 괴로움 속에서 한(恨)을 품은 채 죽어간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는 병으로 인해 제명도 못살게 되었는데,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명조차도 수술로 인해 더 단축시켜 마지막을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만든 것이다. 부모와 사위사이에 딸이 중개인이 되어 사위를 맞아들임으로써 사위와의 인연을 이어 악업을 갚은 결과가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 가족들은 왜 하필 사위가 그 때 귀국해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 원망만을 하고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이 경우도 어려운 중병이었지만 좋은 처방을 얻어 치료를 잘 받고 있었다. 환자도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환자나 환자가족 모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치료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면서 강한 의구심을 심어주어 결국에는 그 때까지 해오던 치료법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이나 의사들이 똑 떼어버리거나 방사능 치료 혹은 항암치료를 받으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세뇌를 하듯이 종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에는 환자 자신의 확신이나 의지가 굳지 않으면 결국에는 이런 말들에 현혹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완치를 생각하고 한 것이 더욱 병을 악화시켜 회복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제명도 살지 못하고 세상과의 이별을 고(告)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여 다른 치료법으로 병세가 많이 호전되고도 자신의 확신이 굳지 않아 결국에는 주변의 악착같은 유혹으로 헤어날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두 자신이 지은 업(業)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유혹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에 대하여 동기는 좋은 뜻으로 했지만 어쩔 수 없던 일들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모자식의 인연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한 주변 사람들과 어떠한 인연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진 것인지 모르는 이상, 우리는 결과를 두고 그 업의 인연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위에서 환자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은 사람이 중병에 걸렸을 때 그 악업을 갚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지금까지 예를 든 것과 비슷한 유형으로 주변에서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형제자매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악업을 갚는 결과가 되는 이는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악업을 갚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는 주변에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때에 전생의 업의 인연에 따라 주변에서 어려운 상황을 접할 확률이 매우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때에는 환자 자신이 병에 대한 확실한 치료법을 알고 이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가도 주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하는 쪽으로 현혹하여 유도하는 경우가 많으며, 환자 자신도 이 때에는 주변의 말이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게 되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쪽으로 이끌려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의술(醫術)의 달인(達人)이 있어 이 병을 치료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업은 각자 자신들의 만들어 놓은 굴레이기 때문에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주변에서 위와 비슷한 경우는 아니더라도 자식이 일찍 죽거나 다쳐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자식을 어렵게 하는 것, 부모가 자식의 앞길을 사사건건 참견하고 방해하는가 하면 자식이 결혼하는 것을 싫어하여 결혼을 못하게 하는 것, 자식이 출세하고자 하는데 부모가 일일이 참견하여 앞길을 막는 것, 부모가 고생스럽게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을 자식이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는 것, 또는 자식이 자손을 두지 못하여 집안의 대를 끊어 놓는 것이나 자식이 부모를 불편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 등 어느 한쪽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경우들은 의도적이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업에 따른 인연이라고 여기면 될 것이다. 이외에도 부인이 현실의 삶에 급급하여 자신의 안위(安慰)를 위해, 남편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의(大義)를 세워 뜻을 펼치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 남편의 앞길을 막는 경우도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치 앞의 현실과 먹고 사는 것에만 급급하여 대의를 그르치게 한다면 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도리(道理)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업(業)에 의한 인연(因緣)의 고리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악업에 의한 인연의 굴레도 주변 사람과 자신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가까스로 악업(惡業)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어 예를 들어보겠다. 이 사람은 암과 같은 중병에 걸렸는데,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금방 치료가 된다고 수술을 강요하고 자식과 남편 형제들까지도 빨리 병원에 가서 똑 떼어버리자고 강요하여 거의 수술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동생 중 하나가 수술하는 것을 반대하여 기를 쓰고 싸워가며 다른 방법을 쓰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싸웠던지 수개월 동안 형제사이에 말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을 정도였다. 동생의 집요하고 고집스런 설득 끝에 동생이 알고 있는 처방을 소개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계속 수술할 것을 강요하고 동생은 두발 벗고 나서서 싸워 수술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병세를 진단하기 위해 검사해본 결과 거의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았고, 환자는 그 때서야 확신을 가지고 동생이 소개한 처방으로 계속 치료하여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완치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수술을 강요하던지 환자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종의 최면에 걸릴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냥 병원에서 수술로 간단히 똑 떼어버려라.” 는 말을 어찌나 해대는지 이 말을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어려운 과정이었기는 했지만, 동생의 집요한 노력으로 악업(惡業)에 의한 인연(因緣)을 피할 수 있었던 예이다.
이처럼 악업에 의한 인연은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주변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신중히 판단하면 의지로 피할 수도 있으니 유념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으로 매스컴에서 방영된 내용 중 하나를 예로 들어 소개하겠다. 이 사람은 밀림의 오지에서 원주민들에게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며 큰사랑의 실천을 한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이다. 어느 날 그의 모국에 있는 부모가 병이 들어 임종(臨終)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 곳의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자신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이 사람들은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부모를 보기위해 모국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서 그대로 원주민들에게 봉사활동을 계속 하였다. 결국 부모는 자식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이 소식을 알렸지만,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채 그 순간에도 원주민들과 함께 집을 짓기 위해 흙벽돌을 찍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매스컴에서는 이것을 그 사람의 봉사정신과 세상에 대한 큰 사랑을 실천하였다고 칭찬하듯이 방영하였지만, 원주민들이 그 사람이 부모가 돌아가셨는데도 부모에게 가보지 않고 그 곳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그의 봉사라고 하는 행동을 받아 들였을지도 의문이다. 만약 원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그의 부모에 대한 그러한(부모 자식의 도리도 저버리는) 사상이 번질까 두려워 추방시켰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원주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까지 했다면 이는 봉사 활동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짐승도 어미가 죽으면 애통하고 슬퍼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이는 사람으로 여길 수도 없고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도리가 있다. 부모의 사랑보다 큰 사랑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것은 아주 근원적인 사랑이다. 이런 근원적인 사랑에 대하여 최소한의 도리도 다하지 못하면서 무슨 큰 사랑 운운하며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과연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아는 사람인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매스컴에서 봉사정신과 큰사랑의 실천의 자세를 알리고자 하였다면 그 사람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까지 함으로써 불효를 선전하는 효과까지 얻은 셈이 됐다. 자신이 오지에서 돌보고 있는 원주민들이 그렇게 불쌍한 줄은 알면서 마지막으로 자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하는 부모의 가슴 아픈 상처는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사랑의 실천을 운운한단 말인가? 부모 자식간에 의절(義絶)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이국땅에서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였을 수도 있으나, 자식된 도리라면 수천, 수만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만사를 제치고 부모에게 달려가야 하는 것이 그 자식된 도리인 것이다. 매스컴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투철한 봉사자로 추앙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는 마음에 깊은 한을 심어주고 이 업은 다음 생에 그 업에 따른 인연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자식이 원수다.” 하는 말이 있다.이 말 또한 수행을 통하여 업과 인연의 이치를 깨달으신 분들이 하신 말씀으로 부모 자식이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사람들이 업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런 업에 의한 인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낳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르면서 가슴 아픈 일도 겪고 온갖 모진 일들도 마다하지 않고 겪으며 맹목적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이 다 자라고 부모가 늙어서는 자식이 부모를 극진히 공양하여 이 업을 풀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이러한 업에 따른 인연의 이치를 바탕으로 업을 풀어가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자식이 어렸을 적에 부모가 버려 고아가 되거나, 부모가 늙었을 때 자식이 부모를 산이나 병원, 거리에 버리는 것은 전생의 업을 풀기는커녕 또 다른 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는 말이 있다. 이 말도 업에 따른 인연을 두고 하는 말로 부모는 정성을 다해 자식을 기르지만, 그 은혜에 대한 갚음이 부모에 대한 정성스런 공양이 아닌 부모를 버리거나 결혼을 하지 않아 집안의 대를 끊어 놓는가 하면 가산을 모두 탕진하는 것과 같이 은혜를 악연으로 갚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이생에서 조금이나마 업을 덜지 못하고 더 큰 업을 짓고 가는 것이다.
전생의 업이 너무 커 자식을 온갖 고초를 겪으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르는 것으로도 그 업을 갚지 못하면 자식이 부모를 죽게 만들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실화를 들어보면, 예전에 경상도에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마을에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하게 사는 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70이 넘은 큰딸을 비롯해 딸이 일곱이고 아들이 둘이 있었다. 90이 넘는 연로한 나이였지만 건강상태가 아주 좋아 집안에서 작은 소일은 거뜬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큰딸이 어머니가 더 늙어 거동을 못하게 되기 전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어머니께 맛있는 것을 대접해 드리고자 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을 모두 소집시켜 어머니와 함께 울산 방어진의 한 횟집에서 회를 먹게 되었다. 효도한답시고 자식마다 어머니에게 회를 상추에 싸서 먹이고 소주 한잔씩을 권하였다. 9명의 자식이 모두 권하는 것을 다 받아먹다 보니, 그 날 어머니는 평소에 먹던 양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과식하게 되었고, 여기에 자식들이 주는 술 한 잔씩을 모두 받아 먹다보니 2홉들이 소주를 1병이 넘도록 마시게 되었다. 90이 넘는 노인이 과식에 한 병이 넘는 소주를 마셨으니, 이것을 소화해 낼 체력이 없었다.
가족이 모두 맛있게 회를 먹고 난 후, 그 날 밤 할머니는 과식한 음식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급체(急滯)하여 배탈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할머니의 병세는 호전을 보이지 않고 점차 악화되어 뇌출혈까지 일어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회를 먹고 난 후 십 여일의 기간동안 의식불명의 상태로 누워 있다가 영원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자식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때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면 어머니께 식사대접도 못해드리고 보내드릴 뻔했다며 횟집에서 식사라도 함께 한 것을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횟집에서 먹은 음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날 횟집에 가서 음식을 먹지만 않았어도 할머니는 예전의 건강한 모습 그대로 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들이 효도 한다고 대접한 것이 오히려 할머니의 수명을 단축시킨 결과를 초래했는데도 자식들은 오히려 잘 대접해 드리고 보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이 모두가 악업에 의한 인연의 결과인 것을 어쩌겠는가. 자식들의 이러한 행동이 과연 효도(孝道)인지 살인(殺人)인지의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지금까지 몇 가지 예를 들어 인연에 대한 설명을 하였지만, 이 뿐만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모든 행동은 업(業)이 되어 훗날 자신의 인연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연의 고리는 악업과 선업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우리의 삶을 때로는 행복으로 때로는 불행으로 이끄는 것이다. 매 순간 순간 자신의 사고(思考)와 행동을 신중히 판단하고 상황을 직시(直視)할 수 있는 지혜(智慧)만이 이 세상의 업(業)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회(輪廻)라는 것이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는 없다고 하여 인연이 종교에 따라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理致)이다.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도(道)를 얻어 이러한 윤회의 이치를 깨달은 이가 없어서 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종교에 따른 차등이 있을 뿐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전생(前生)의 악업(惡業)이나 선업(善業)에 따라 이생에서 이어진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인연이 연인, 친구, 형제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부모 자식이 되어 올 수도 있으며,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만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전생의 선업에 의해서 이어져 이생에서 인연으로 만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악업에 의해 이생에서 만나기도 한다. 선업으로 이생에서 인연이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악업으로 이생에서 만나게 됐다면 반드시 그 악업을 갚는 관계가 된다. 그 관계가 부모자식이나 연인 친구처럼 밀접한 관계로 나타나 본인들은 정작 그것을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어느 순간 그 업(業)을 갚게 되는 것이다.
주역(周易) 곤괘(坤卦)의 내용 중에 인연(因緣)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신시기군 자시기부 비일조일석지고
其所由來者 漸矣 由辯之不早辯也
기소유래자 점의 유변지부조변야
易曰履霜堅氷至 蓋言順也 (順:愼)
역왈리상견빙지 개언순야
[번역]
선(善)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慶事)가 있고, 악업(惡業)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災殃)이 따른다. 신하(臣下)가 그 군주(君主)를 살해(殺害)하고, 자식이 그 부모를 죽이는 일은 하루아침 하루 저녁의 연고(緣故)가 아니다.
그 유래는 오래 전부터 쌓여온 것이니, 분별하여야 할 때 일찍이 분별하지 못한 데에 유래가 있다. 역(易)에 이르기를 서리도 밟으면 마침내 얼음에 이르게 되니, 모든 일은 신중하게 순리(順理)를 따라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따라 진행되며, 그 원인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쌓인 업(業)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말하고자 하는 문장으로, 인연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한 문장이다.
이러한 인연의 이치에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선업(善業)에 의한 좋은 인연은 제외하고라도 악업(惡業)에 의한 인연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도록 하겠다.
아주 어려운 중병에 든 환자의 이야기로 그 환자의 자식은 부모를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 구해다 먹이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 중에 주변에서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환자의 병에도 좋은 것으로 알고 먹여 결국에는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이 이생에서 서로 인지(認知)하지는 못하지만, 전생의 업을 인연에 따라 갚은 결과가 된 것이다. 자식된 도리로 잘 해드린다고 한 것이 도리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즉 ‘악업을 갚는다’는 것이 마음먹고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위와 비슷한 경우로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이 사람의 경우도 환자였는데 다행히 운이 좋았던지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얻어 치료를 잘 받고 있었다. 그런데 환자의 자식은 조금이라도 빨리 쾌차하도록 하기위해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이것저것 구해다 먹였다. 그 중에 환자에게는 물론 일반인조차도 견디기 힘든 것을 남이 좋다고 하는 말만 믿고 먹여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평상시에는 그런 것을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 힘든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지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다른 것을 먹였다는 사실조차도 숨기고 병세가 악화된 후에는 원인을 도리어 다른 곳에 돌리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면, 이 경우도 치료가 어려운 병에 걸린 환자로 본래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자식은 학교에 다니고, 부인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환자가 거동하고 움직이는데 불편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이 운이 좋아 치료법과 처방을 얻어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어느 날 시골에 살던 환자의 형님이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도 할 겸 시골에 와서 있으라고 권유했다. 환자는 듣고 보니 학교 다니는 자식이나 직장 다니는 부인에게 걱정과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가족과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형님집에 가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환자의 가족들은 안부도 물을 겸 하루에 한 번씩 환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환자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병세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못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만을 주고 받았다. 환자도 또한 자식이나 부인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병세 대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자에 대한 병세가 전혀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고, 환자 가족들은 형님집에서 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만 있었는데, 어느 날 위중하다는 소식이 왔다. 알고 보니 같은 핏줄의 형제지간이긴 하지만 내 집만큼 편하지도 않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는 하지만 형제지간에도 부담감이 들어 말할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가족에게는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말하지 못하고, 형님에게도 부담이 되서 필요한 것을 말하지 못하여 환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은 점점 부실해져 간 것이다.
간혹 환자의 형님집에서는 주변에서 몸에 좋다는 것을 구하여 환자에게 나쁜지 좋은 지도 모른 채 복용시키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몸이 부실해진 상태에서 이것이 사용하고 있던 약의 효능을 무력화시키고 있었고, 심적인 부담과 마음고생이 가중되어 병세는 더욱 악화 되었던 것이다.
또한, 환자의 병세가 지속적으로 파악이 되어야 올바른 치료를 할 것인데, 환자를 배려한다는 가족들이 마음이 이것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중하다는 소식에 환자에게 갔을 때는 이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에는 한(恨)을 품은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환자의 가족이나 형님은 해줄 것은 다해줬다고 하며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것이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업(業)의 인연에 따라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져 환자도 자신이 죽음의 길을 간 것이고, 환자의 가족이나 형님에 의해서도 또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이 사람의 경우도 중병에 걸린 사람으로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는 수술을 권유 받았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그 병을 수술하고 회복된 경우가 거의 드물다는 것을 알고 수술을 한사코 만류 하였다. 환자의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만 태우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외국에 있던 사위가 우연히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위라는 사람은 여러 유명 병원에 의사들과 친분이 있으니 자신이 나서서 그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수술하면 문제없다고 자신있게 장담하였다.
별다른 대책이 없던 터라 환자의 가족들은 이 말에 이끌려 결국 환자를 수술하게 되었다. 그 후 수술 이전의 상태는커녕 환자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확실하게 회복불능으로 만들어 심적 육체적 고통을 더욱 가중시켜 괴로움 속에서 한(恨)을 품은 채 죽어간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는 병으로 인해 제명도 못살게 되었는데,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명조차도 수술로 인해 더 단축시켜 마지막을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만든 것이다. 부모와 사위사이에 딸이 중개인이 되어 사위를 맞아들임으로써 사위와의 인연을 이어 악업을 갚은 결과가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 가족들은 왜 하필 사위가 그 때 귀국해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 원망만을 하고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이 경우도 어려운 중병이었지만 좋은 처방을 얻어 치료를 잘 받고 있었다. 환자도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환자나 환자가족 모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치료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면서 강한 의구심을 심어주어 결국에는 그 때까지 해오던 치료법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이나 의사들이 똑 떼어버리거나 방사능 치료 혹은 항암치료를 받으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세뇌를 하듯이 종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에는 환자 자신의 확신이나 의지가 굳지 않으면 결국에는 이런 말들에 현혹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완치를 생각하고 한 것이 더욱 병을 악화시켜 회복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제명도 살지 못하고 세상과의 이별을 고(告)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여 다른 치료법으로 병세가 많이 호전되고도 자신의 확신이 굳지 않아 결국에는 주변의 악착같은 유혹으로 헤어날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두 자신이 지은 업(業)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유혹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에 대하여 동기는 좋은 뜻으로 했지만 어쩔 수 없던 일들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모자식의 인연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한 주변 사람들과 어떠한 인연에 의해 만남이 이루어진 것인지 모르는 이상, 우리는 결과를 두고 그 업의 인연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위에서 환자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은 사람이 중병에 걸렸을 때 그 악업을 갚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지금까지 예를 든 것과 비슷한 유형으로 주변에서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형제자매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악업을 갚는 결과가 되는 이는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악업을 갚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는 주변에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때에 전생의 업의 인연에 따라 주변에서 어려운 상황을 접할 확률이 매우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때에는 환자 자신이 병에 대한 확실한 치료법을 알고 이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가도 주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하는 쪽으로 현혹하여 유도하는 경우가 많으며, 환자 자신도 이 때에는 주변의 말이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게 되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쪽으로 이끌려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의술(醫術)의 달인(達人)이 있어 이 병을 치료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업은 각자 자신들의 만들어 놓은 굴레이기 때문에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주변에서 위와 비슷한 경우는 아니더라도 자식이 일찍 죽거나 다쳐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자식을 어렵게 하는 것, 부모가 자식의 앞길을 사사건건 참견하고 방해하는가 하면 자식이 결혼하는 것을 싫어하여 결혼을 못하게 하는 것, 자식이 출세하고자 하는데 부모가 일일이 참견하여 앞길을 막는 것, 부모가 고생스럽게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을 자식이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는 것, 또는 자식이 자손을 두지 못하여 집안의 대를 끊어 놓는 것이나 자식이 부모를 불편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 등 어느 한쪽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경우들은 의도적이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업에 따른 인연이라고 여기면 될 것이다. 이외에도 부인이 현실의 삶에 급급하여 자신의 안위(安慰)를 위해, 남편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의(大義)를 세워 뜻을 펼치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 남편의 앞길을 막는 경우도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치 앞의 현실과 먹고 사는 것에만 급급하여 대의를 그르치게 한다면 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도리(道理)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업(業)에 의한 인연(因緣)의 고리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악업에 의한 인연의 굴레도 주변 사람과 자신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가까스로 악업(惡業)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어 예를 들어보겠다. 이 사람은 암과 같은 중병에 걸렸는데,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금방 치료가 된다고 수술을 강요하고 자식과 남편 형제들까지도 빨리 병원에 가서 똑 떼어버리자고 강요하여 거의 수술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동생 중 하나가 수술하는 것을 반대하여 기를 쓰고 싸워가며 다른 방법을 쓰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싸웠던지 수개월 동안 형제사이에 말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을 정도였다. 동생의 집요하고 고집스런 설득 끝에 동생이 알고 있는 처방을 소개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도 주변 사람들은 계속 수술할 것을 강요하고 동생은 두발 벗고 나서서 싸워 수술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병세를 진단하기 위해 검사해본 결과 거의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았고, 환자는 그 때서야 확신을 가지고 동생이 소개한 처방으로 계속 치료하여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완치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수술을 강요하던지 환자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종의 최면에 걸릴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냥 병원에서 수술로 간단히 똑 떼어버려라.” 는 말을 어찌나 해대는지 이 말을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이 경우는 어려운 과정이었기는 했지만, 동생의 집요한 노력으로 악업(惡業)에 의한 인연(因緣)을 피할 수 있었던 예이다.
이처럼 악업에 의한 인연은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주변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신중히 판단하면 의지로 피할 수도 있으니 유념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으로 매스컴에서 방영된 내용 중 하나를 예로 들어 소개하겠다. 이 사람은 밀림의 오지에서 원주민들에게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며 큰사랑의 실천을 한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이다. 어느 날 그의 모국에 있는 부모가 병이 들어 임종(臨終)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 곳의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자신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이 사람들은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부모를 보기위해 모국으로 가지 않고 그곳에서 그대로 원주민들에게 봉사활동을 계속 하였다. 결국 부모는 자식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이 소식을 알렸지만,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채 그 순간에도 원주민들과 함께 집을 짓기 위해 흙벽돌을 찍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매스컴에서는 이것을 그 사람의 봉사정신과 세상에 대한 큰 사랑을 실천하였다고 칭찬하듯이 방영하였지만, 원주민들이 그 사람이 부모가 돌아가셨는데도 부모에게 가보지 않고 그 곳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그의 봉사라고 하는 행동을 받아 들였을지도 의문이다. 만약 원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그의 부모에 대한 그러한(부모 자식의 도리도 저버리는) 사상이 번질까 두려워 추방시켰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원주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까지 했다면 이는 봉사 활동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짐승도 어미가 죽으면 애통하고 슬퍼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이는 사람으로 여길 수도 없고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도리가 있다. 부모의 사랑보다 큰 사랑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것은 아주 근원적인 사랑이다. 이런 근원적인 사랑에 대하여 최소한의 도리도 다하지 못하면서 무슨 큰 사랑 운운하며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과연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아는 사람인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매스컴에서 봉사정신과 큰사랑의 실천의 자세를 알리고자 하였다면 그 사람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까지 함으로써 불효를 선전하는 효과까지 얻은 셈이 됐다. 자신이 오지에서 돌보고 있는 원주민들이 그렇게 불쌍한 줄은 알면서 마지막으로 자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하는 부모의 가슴 아픈 상처는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사랑의 실천을 운운한단 말인가? 부모 자식간에 의절(義絶)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이국땅에서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였을 수도 있으나, 자식된 도리라면 수천, 수만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만사를 제치고 부모에게 달려가야 하는 것이 그 자식된 도리인 것이다. 매스컴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투철한 봉사자로 추앙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는 마음에 깊은 한을 심어주고 이 업은 다음 생에 그 업에 따른 인연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자식이 원수다.” 하는 말이 있다.이 말 또한 수행을 통하여 업과 인연의 이치를 깨달으신 분들이 하신 말씀으로 부모 자식이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사람들이 업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런 업에 의한 인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낳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르면서 가슴 아픈 일도 겪고 온갖 모진 일들도 마다하지 않고 겪으며 맹목적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이 다 자라고 부모가 늙어서는 자식이 부모를 극진히 공양하여 이 업을 풀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이러한 업에 따른 인연의 이치를 바탕으로 업을 풀어가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자식이 어렸을 적에 부모가 버려 고아가 되거나, 부모가 늙었을 때 자식이 부모를 산이나 병원, 거리에 버리는 것은 전생의 업을 풀기는커녕 또 다른 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는 말이 있다. 이 말도 업에 따른 인연을 두고 하는 말로 부모는 정성을 다해 자식을 기르지만, 그 은혜에 대한 갚음이 부모에 대한 정성스런 공양이 아닌 부모를 버리거나 결혼을 하지 않아 집안의 대를 끊어 놓는가 하면 가산을 모두 탕진하는 것과 같이 은혜를 악연으로 갚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이생에서 조금이나마 업을 덜지 못하고 더 큰 업을 짓고 가는 것이다.
전생의 업이 너무 커 자식을 온갖 고초를 겪으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르는 것으로도 그 업을 갚지 못하면 자식이 부모를 죽게 만들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실화를 들어보면, 예전에 경상도에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마을에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하게 사는 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70이 넘은 큰딸을 비롯해 딸이 일곱이고 아들이 둘이 있었다. 90이 넘는 연로한 나이였지만 건강상태가 아주 좋아 집안에서 작은 소일은 거뜬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큰딸이 어머니가 더 늙어 거동을 못하게 되기 전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어머니께 맛있는 것을 대접해 드리고자 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을 모두 소집시켜 어머니와 함께 울산 방어진의 한 횟집에서 회를 먹게 되었다. 효도한답시고 자식마다 어머니에게 회를 상추에 싸서 먹이고 소주 한잔씩을 권하였다. 9명의 자식이 모두 권하는 것을 다 받아먹다 보니, 그 날 어머니는 평소에 먹던 양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과식하게 되었고, 여기에 자식들이 주는 술 한 잔씩을 모두 받아 먹다보니 2홉들이 소주를 1병이 넘도록 마시게 되었다. 90이 넘는 노인이 과식에 한 병이 넘는 소주를 마셨으니, 이것을 소화해 낼 체력이 없었다.
가족이 모두 맛있게 회를 먹고 난 후, 그 날 밤 할머니는 과식한 음식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급체(急滯)하여 배탈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할머니의 병세는 호전을 보이지 않고 점차 악화되어 뇌출혈까지 일어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회를 먹고 난 후 십 여일의 기간동안 의식불명의 상태로 누워 있다가 영원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자식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때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면 어머니께 식사대접도 못해드리고 보내드릴 뻔했다며 횟집에서 식사라도 함께 한 것을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횟집에서 먹은 음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날 횟집에 가서 음식을 먹지만 않았어도 할머니는 예전의 건강한 모습 그대로 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들이 효도 한다고 대접한 것이 오히려 할머니의 수명을 단축시킨 결과를 초래했는데도 자식들은 오히려 잘 대접해 드리고 보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이 모두가 악업에 의한 인연의 결과인 것을 어쩌겠는가. 자식들의 이러한 행동이 과연 효도(孝道)인지 살인(殺人)인지의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지금까지 몇 가지 예를 들어 인연에 대한 설명을 하였지만, 이 뿐만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모든 행동은 업(業)이 되어 훗날 자신의 인연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연의 고리는 악업과 선업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우리의 삶을 때로는 행복으로 때로는 불행으로 이끄는 것이다. 매 순간 순간 자신의 사고(思考)와 행동을 신중히 판단하고 상황을 직시(直視)할 수 있는 지혜(智慧)만이 이 세상의 업(業)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일본의 일장기 | 三元 | 2021.01.23 | 853 |
공지 | 천상에서 인간에게 내린 뇌화침법雷火鍼法 [1] | 삼원회 | 2019.05.09 | 1809 |
공지 | 선도수행자仙道修行者의 호흡법呼吸法 | 삼원회 | 2016.02.11 | 5053 |
39 | 기축옥사(2) | 현도학회 | 2005.02.26 | 3371 |
38 | 기축옥사의 불씨 기묘사화(1) | 현도학회 | 2005.02.25 | 2866 |
37 |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의 실추된 명예 | 현도학회 | 2005.02.23 | 3477 |
36 | 원상수행은 조식수행의 정도가 아니다. | 현도학회 | 2005.02.21 | 2785 |
35 | 중국한족의 문화에서 삼태극이 드문 이유 | 현도학회 | 2005.02.21 | 2945 |
34 | 주문수행(呪文修行)에 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 현도학회 | 2005.02.13 | 2789 |
33 | 인종의 승하와 조선기인의 고뇌 | 현도학회 | 2005.01.19 | 2871 |
32 | 용호비결에 대한 부연설명 | 현도학회 | 2004.12.28 | 2929 |
31 | [답변]<b>삼원학회는 연정원과 무관하다.</b> | 현도학회 | 2003.07.21 | 6305 |
30 | 절제(節制)의 미덕 | 현도학회 | 2004.12.16 | 2455 |
29 | 낙태의 죄와 업 | 현도학회 | 2004.11.08 | 3222 |
28 |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것은....... | 현도학회 | 2004.11.05 | 2457 |
27 |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 | 현도학회 | 2004.11.02 | 2556 |
26 | 한로절에 뇌성이 치고 일식이 일어나는 것은 | 현도학회 | 2004.10.21 | 2560 |
25 | 삼원학회 홈페이지의 접속불량 [1] | 현도학회 | 2004.09.21 | 2608 |
24 | 친일 과거사 청산 이전에 되찾아야 할 우리의 영토 | 현도학회 | 2004.09.14 | 2197 |
23 | 남북통합이후 민족의 대통일 | 현도학회 | 2004.08.27 | 2356 |
22 | 고구려사 왜곡 - 중국정부에 감사한다. | 현도학회 | 2004.08.10 | 2318 |
21 | 백산민족의 성지 | 현도학회 | 2004.01.25 | 3172 |
» | 인연 | 현도학회 | 2002.12.02 | 37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