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환허(鍊神還虛)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신은 기에서 나온 것이다. 신은 오행으로 화(火)에 해당하며 빛으로 상징된다. 오장(五臟)으로는 심장(心臟)이 주관한다. 이러한 관계로 도가에서는 심장을 신의 안방이라고도 한다. 신은 정과 기와는 달리 크고 작은 양의 개념이 아니고 밝고 어두운 빛의 개념이다. 정기가 왕성하면 신은 밝게 빛나고, 정기가 쇠약하면 신은 빛을 잃게 된다. 자식이 부모의 보호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쌓인 기가 신으로 화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어떠한 욕망이나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야 기로써 신을 기를 수 있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마음의 상태가 가능하지는 않다.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노력을 하다 보면 잠깐 동안씩 고요해 지면서 차츰 나아지다가 마침내는 마음이 완전히 비워지는 허(虛)의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 때 즈음이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게 된다.
신은 몸의 주인이다
신은 몸의 주인이고, 마음은 신의 주인이다. 이 두 가지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신은 정과 기에 의지하여 빛을 발하는데, 정기가 고갈되면 신은 의존할 근거가 없어 그 빛을 잃어 마침내 몸을 떠나게 되어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이다. 정기신을 기르면 건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이 몸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음은 신의 주인이므로 마음이 가면 신도 따라 가고, 신을 보좌하는 정과 기도 자연히 따라간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까닭은 바로 마음이 신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조식수행을 할 때 시선을 아래에 두고 의식(마음)을 오로지 단전에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과 신의 주종관계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이어보자.
신은 마음의 빛이다
신을 빛의 개념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빛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태양이나 전등의 빛처럼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 마음의 빛이다. 눈에 보이는 빛은 형이하학(形而下學)적 개념이지만, 마음의 빛은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개념이다. 정기신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어려운 이유는 형이상학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구분도 실은 이 또한 상대적 개념이다. "귀신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죽으면 모두 끝이다." 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귀신이 형이상학의 개념이 되지만, 귀신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귀신은 이미 형이하학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은 조식수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큼 수행의 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정신이라는 단어는 정기신을 줄인 말로 근원을 거슬러서 유래를 살피면 도가의 전문용어이다. 기를 뺀 이유는 아마도 근원인 정의 최종 목적은 신의 배양에 있기 때문인 듯하다.
마음의 빛인 신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도달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신이 도달하지 않는 곳은 없으며, 알 수 없는 것도 없다. 신은 그 밝음의 범위 내에서는 전지전능하다. 다만, 신의 밝기에 따라 능력의 고하(高下)가 있을 따름이다.
밝을수록 보다 멀리 보다 많은 것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을 넘어서는 곳까지 도달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길러낸 마음의 빛인 신이 도달해서 알게 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도의 세계에서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비롯한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마장과도 마음으로 싸우며, 보는 것도 아는 것도 모두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이며,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도 그 내막은 석가와 가섭존자(迦葉尊者)간의 마음의 대화이다.
예로부터 대덕고승이나 계제가 높은 도인들간에는 의사를 소통하는데 말이나 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한쪽에서 마음을 일으키면 신은 자연히 따라 움직이고, 상대방의 거울 같은 마음이 이것을 감지하여 상대방의 의중을 읽었던 것이다.
깨닫기 위해서는 신을 길러야 한다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닫기 위해서 마음이 허(虛)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우주의 근원이 허(虛)이기 때문이다. 연신환허(鍊神還虛 - 신을 연마하여 허로 돌아감)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부분은 다음의 역즉위선逆則爲仙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
신이 멀리 허(虛)에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대단히 밝아야 가능하다. 마음이 가고자 하여도 신의 밝기가 부족하여 따라가지 못하면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모르는 것이 많아 답답한 것도 신이 밝지 못하여 연고를 밝히지 못하는 이유에서이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정과 기에 해당하는 만큼의 신이 있다. 예감이나 예지력, 텔레파시 등은 모두 신의 작용이다. 다만, 신이 충분히 밝지 못하여 분명하지 않을 따름이다.
조식수행에서 현상(現象)과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모두 마음의 빛으로 미래와 과거를 비추어 보는 것이다. 수행의 단계에서 소주천 말기쯤부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눈앞에서 눈이 내리는 것이 보이는가 하면 밝은 빛이 현상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 때가 비로소 수행을 통하여 신의 밝기가 사람들과는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처음에는 현상이 희미하게 나오다가 수행이 깊어질수록 점차 밝게 보이는 이유는 수행을 통하여 신의 빛이 점점 밝아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보고자 하는 것이 현상으로 나오지 않고 엉뚱한 것들이 나오다가 신이 더욱 밝아지면 마침내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들이 현상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정기신을 길러서 신이 밝아지면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정기신의 상호관계와 육체와 신의 관계 그리고 마음과 신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천지인’이나 ‘정기신’ ‘육체와 신 그리고 마음’ 이들 삼자의 관계는 삼위일체의 개념으로서 만유에 대한 설명이 되므로 이 관계를 이해하면 비단 조식수행뿐만 아니라 동양문화 전반에 걸쳐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