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창 수도이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시급한 문제는 수도이전이 아니라 청와대의 이전이 더욱 중요하다. 청와대가 지금의 자리에 들어선 이래 역대의 대통령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그릇된 사고와 비리에 연루되어온 것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청와대가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좋은 길지(吉地)에만 있었더라도 현 정권이 수도이전과 같은 문제로 대통령이 아집과 독선을 부리며 나라의 정책을 펼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라가 미래로 도약하여 웅비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는 통치자의 집무실인 청와대를 이전하는 것이다.
지금 청와대가 들어선 자리는 조선왕조가 개국(開國)되면서 창건된 경복궁(景福宮)과 지리적으로 같은 맥락(脈絡)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등지고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右白虎)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경복궁이 현재 보이는 자리에 들어서기 까지는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인 야심의 배경이 깔려 있다. 조선 개국당시 태조(太祖)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인물들로는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과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舞鶴大師)가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왕권(王權)은 미약하고 신하(臣下)의 힘이 강력한 신권정치(臣權政治)를 원하고 있었고, 정치적인 야심과는 무관하며 왕사(王師)이기도 했던 무학대사는 강력한 통치자 아래 나라의 기강이 바로선 강력한 왕권정치(王權政治)를 바라고 있었다.
이것이 궁궐(宮闕)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에도 작용하여 정도전은 북악산(北岳山)을 주산으로 하여 현재의 경복궁 자리를 태조 이성계에게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고, 무학대사는 인왕산(仁王山)을 주산으로 하여 북악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하는 자리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궁궐을 남향으로 하여 현재의 자리에 경복궁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설에는 무학대사가 주장하던 자리가 무악재 근방이라는 이도 있지만, 무학대사가 주장하던 자리는 인왕산 아래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청운동, 효자동을 포함하는 자리이다. 정도전의 의견에 태조 이성계의 마음이 기운 것을 알아차린 무학대사는 지금의 경복궁의 자리가 조선왕조가 500년은 이어갈 수 있지만, 수많은 왜침과 미약한 왕권을 우려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결과 조선왕조 518년 동안 27명의 왕이 즉위하여 강력한 왕권정치를 펼친 임금은 태종과 세종, 세조 세 명의 왕들 뿐 이었으며, 나머지 왕들은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왕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강력한 왕권중심의 정치를 펼치지는 못하였다.
신권정치를 강화하고자 하던 정도전이 왕권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참살되고 태종, 세종에 이르기 까지 강력한 왕권아래 정치가 이루어 졌지만, 이후 문종, 단종은 왕위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이후 세조가 집권하면서 신권주의를 강화하고자 했던 사림의 거두 김종직을 정치일선에서 몰아내면서 다시 강력한 왕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세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다시 신권이 강화되어 왕은 신하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강력한 왕권을 발휘하던 세 임금 중에서 태종임금의 아들인 세종대왕은 무학대사가 주장하던 그 자리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세종대왕은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덕(德)으로써 정치를 펼친 우리민족의 성군(聖君)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강력한 왕권으로 조선의 영토를 넓히고 4군 6진의 설치는 물론 대마도까지 정벌하여 조선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후에는 세조를 끝으로 조선왕조가 역사에서 끝을 맺는 순간까지 강력한 왕권정치를 펼친 임금은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모두 조선의 개국당시 정도전의 모략에 의해 왕이 강력한 통치력을 갖지 못하도록 풍수적으로 궁궐을 그러한 자리에 배치시켜 신권을 강화하는데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조선시대에 많은 궁궐이 지어졌지만, 무학대사가 주장하던 자리에는 궁궐이 들어서지 않았다. 이 또한 강력한 왕권(王權)을 배척하고 신권(臣權)을 강화하여 왕위에 굴림하고자 했던 신권주의자들이 짓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리적으로 살펴본다면, 현재 경복궁(景福宮) 자리는 주산(主山)인 북악산(北岳山)이 경복궁을 감싸주지 못하고 오히려 충(沖)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까지 억세고 강해서 주변세력들이 왕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왕은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북악산 뒤로 북한산(北漢山)의 보현봉이 경복궁의 귀봉(도둑 봉우리)으로 작용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외침을 당하고 나라를 잃게 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주산인 북악산이 궁을 잘 감싸주지 못하고 충으로 찍고 있기 때문에 항상 왕권이 불안하고 신하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였던 것이다.
지금의 청와대는 경복궁의 자리와 다를 바가 없는 곳이다. 오히려 흉한 자리의 시발점이 되는 곳으로 경복궁보다도 더 흉한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집이 들어서서는 안 될 자리이다. 이런 자리에는 남과 힘을 겨루거나 경쟁하는 군사훈련장이나 태권도, 유도, 레슬링 같은 격투기 훈련장으로는 적당한 자리이다. 지금의 청와대는 600여년 전에 강력한 신권정치를 바라던 정도전이 원하던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들을 살펴보아도 청와대 안에만 들어가면 여러 사건과 비리에 연루되어 임기동안 국정을 제대로 운영해온 대통령은 실제적으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청와대를 지을 당시 공사 중에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쓰여진 석판이 출토되었다고 하여 명당(明堂)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깟 돌판 하나가 지리(地理)의 이치까지 바꿔가며 길지(吉地)가 아닌 곳을 길지로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지리적인 이치를 따져보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절대로 명당일 수 없는 곳이다. 아마도 이미 오래전에 정도전과 같은 무리들이 미약한 왕권아래서 강력한 신권을 바탕으로 왕위에 굴림하기 위해 묻어두었던 비책(秘策)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선왕조 518년의 역사가 그러하였으며, 또한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와대에 들어간 역대의 대통령들은 대부분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고 아랫사람들에게 휘둘리다 정치를 그르치지 않았던가. 이 자리는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들어가 정치를 한다해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을 곳이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주장대로 하여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지금의 옥인동과 청운동, 효자동에 해당하는 자리에 궁궐(宮闕)을 세웠더라면 조선의 국운(國運)이 융성하여 만주벌판은 물론 왜구까지 손아귀에 넣을 만한 대단한 길지(吉地)이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청룡 백호가 잘 감싸주고 있으며 좌청룡에 북악산이 우뚝 솟아 왕이 강력한 왕권으로 정치를 펼칠 수 있는 길지를 형성하고 있다.
지금 수도이전을 하겠다고 정부에서는 다각적인 논리를 펴며 정당성만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풍수학자들까지 동원하여 지금의 청와대의 자리처럼 뒤에 필봉이 우뚝 솟아 지리적으로 유사한 곳을 설정하여 청와대가 들어설 좋은 길지가 있다고 까지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공주 연기에는 어느 곳에도 수도가 들어설 만한 길지가 없다. 또한 위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지금과 지리적으로 유사한 자리에 또 청와대가 들어선다면 우리가 융성해져서 북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쪽 세력이 융성해져 이 나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의 되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현재의 수도이전 정책이 대통령과 정부에게는 내세울 만한 큰 치적을 세울 수 있는 매력적인 아이템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이것으로 인해 우리의 국력이 소진되어 앞으로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된다면 훗날 오랜 세월을 두고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이자 우리민족의 미래의 희망을 짓밟은 역적(逆賊)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현 정권에서 국가적인 치적을 세우고 민심을 얻고자 한다면, 수도를 이전할 것이 아니라 청와대의 자리를 이전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국운을 살리고 강력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으로 미래를 향한 발판을 다진다면 훗날 이름이 길이 빛날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저 엉뚱한 발상에서 벗어나 청와대를 인왕산 아래 옥인동과 청운동, 효자동의 중심에 해당하는 자리에 옮기게 되면 나라도 안정되고 강력한 통치자 아래 부국강병을 이루어 국가의 위상은 한층 더 높아지고 우리가 북으로 북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디딤돌이 되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도이전과 같은 국가적인 대사(大事)는 한나라의 운명을 뒤엎어 놓을 수 있는 막중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할 대상이 아니다. 정치를 하는 자가 후대(後代)에 남을 치적(治績)이나 당리당략(黨利黨略)을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덕(德)으로써 정치를 펼쳐나간다면 지역편중적인 민심(民心)이 아닌 전 국민의 호응을 얻어 정치적인 난국(難局)들도 해결되어 나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수도이전과 같은 국가적인 대사에 민의가 아닌 정치적인 목적이나 당리당략을 위해 밀고 나간다면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여 헤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무학대사가 주장하던 자리의 부근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태종의 아들인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우리민족에게 지금까지 성군(聖君)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강력한 왕권으로 4군(軍)6진(陣)은 물론 대마도까지 정벌하여 국력을 대내외적으로 떨친 임금이다. 이후에도 세종대왕의 아들인 세조임금이 강력한 왕권정치를 펼치고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에는 태종이나 세종, 세조와 같이 강력한 왕권정치를 펼친 왕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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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는 지금의 자리에 궁궐이 세워지면 200년 이후에 큰 전란이 있지만 500년 은 이어 갈 것이라고 전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