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己丑獄死)
남곤을 중심으로 한 훈구공신들의 모략에 의해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와 같은 젊은 개혁적인 신진사료들이 대거 숙청을 당하자, 조정은 다시 훈구공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왕권(王權)은 훈구공신들에 의해 휘둘리게 되었다. 신진사료들의 처형을 말류하던 안당은 기묘사화 이후 곧 파직되었으며 중종16년에는 “나라를 그르친 간사한 수괴”로 까지 몰려 관직까지 삭탈 당하였다. 이것이 훗날 신사사화를 거쳐 기축옥사가 발발하는 불씨가 되었다.
안당의 집안에는 송사련(宋祀連)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안당의 얼매(孼妹)의 아들로써 안당과는 외삼촌 지간이었으며 훗날 서인의 거두가 된 구봉 송익필의 부친이다. 송사련은 재간이 많고 총명하여 안씨가의 신애를 받아 집안의 대소사를 위임받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1521년 중종16년에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친구들과 당시의 훈구세력들을 제거하면 선비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성토했는데, 송사련은 이것을 빌미로 잡아 처조카인 정상과 함께 안당, 안처겸(안당의 아들) 등이 남곤, 심정 등의 훈구공신들을 제거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신진사림들을 옹호하고자 했던 안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곤과 심정은 이것을 “모역”으로 부풀려 신사무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안씨일가는 몰락하게 되었으며, 송사련은 그 공로로 정3품의 당상관에 오르게 되었고 안씨 집안의 노비와 전답을 차지했으며 이후 30년간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신사무옥의 공신인 송사련은 5남1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서자(庶子)인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과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은 학문과 도학에 매우 뛰어나 그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율곡 이이도 말하기를 “성리학을 논할만한 사람은 익필과 한필 형제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학문은 매우 뛰어났다고 전한다. 또한 구봉 송익필은 이산해와 더불어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 또한 많았다. 또한 구봉의 탁월한 능력과 재주로 인해 서인의 거두로 일컬어졌으며 서인모주(西人謀主)라는 세평이 있을 정도로 그는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 재량이 뛰어남에도 전날 그의 아버지인 송사련의 간사함이 훗날 구봉과 운곡을 비롯한 그들 집안의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선조19년 동인에 의해 안당,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지면서 송사련의 관직이 삭탈되고 안당의 손자인 윤의 상소와 동인들의 공세로 인해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를 비롯한 그의 일가 70여명은 종의 신분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동인들이 안당의 아버지인 안돈후의 서녀(庶女)로만 알려졌던 송익필의 외할머니가 안돈후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가 아니라, 종이었던 전남편의 소생이라고 주장하며 종의 자식이니 송익필의 일가를 환천(還賤)해 달라고 상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법전(法典)에는 종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도망 후 60년이 지나면 환천(還賤)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상소로 이미 60년이 훨씬 지난 외조모의 출생에 대한 논란의 결과 종의 신분이 된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는 동인들에 대한 혈원(血怨)의 한(恨)을 품었을 것이다.
졸지에 종의 신분으로 전락한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 형제는 안씨집안의 복수를 피해 집안이 뿔뿔히 흩어져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하던 중 동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한 모략을 꾸미게 된다. 당시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이 전라도에서 대동계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것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는 전라도에서 역모를 위한 군사가 조련되고 있다는 소문이 황해도에서 퍼지도록 하였고, 이것이 황해도 관찰사의 상소로 조정에 알려지면서 서인들은 동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기축옥사가 발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동인들에 의해 4번이나 낙향을 했던 서인측의 정철이 중심이 되어 선두에서 지휘하여 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었거나 서신을 교류한적이 있는 동인은 물론, 연루자와 이름이 비슷한 사람까지 처형을 하는 등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되어 1000여명이 희생된 조선최대의 사화가 되었다.
그러나 기축옥사로 서인들이 조정의 주도세력이 되어 동인들을 일망타진하는 데에는 성공을 했지만, 수 많은 조정신료들의 죽음으로 인해 조정은 황폐화 되었으며, 3년 뒤 전란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했던 조선은 왜군에게 국토를 침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결국 개인의 복수심과 결합된 당파싸움이 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으며 조선을 황폐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기축옥사의 배후 인물이었던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 형제 역시 복수는 했지만 끝내 신분은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떠돌아 다니다 한(恨)을 품은 채 객사하였다고 전한다. 구봉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제자였던 김장생이 수습하여 현재의 충남 당진군 원당면 안골이라는 곳에 장사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고향인 파주에는 현재 그를 추모하는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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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대동계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당시 정여립의 사상과 언동이 급진적이기는 했지만 그의 대동계는 장차 닥쳐올 전란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를 조련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의혹이 있다.
김장생의 <송강행록>에는 황해도에서 상소가 올라와 조정이 어수선할 때 동인들은 정여립이 상경하여 변명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정철은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훗날 쓰여진 <동소만록>에는 기축옥사에 대해 “기축옥은 송익필이 뒤에서 조종하고 정철이 이를 성사시켰다”고 전하고 있으며, <동남소사>에는 “변성명한 송익필이 황해도에서 복술가로 가장하여 향방토호로서 허세가 있는 자들에게 전라도의 정씨 성 가진 사람이 천명을 받았는데, 그와 사귀면 부귀를 누린다” 고 소문을 내어 그들로 하여금 정여립에게 달려가도록 유도했다고 전한다.
현재에도 기축옥사의 배후에 대해서는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 형제가 자신의 집안을 노비로 전락시킨 동인(東人)에 대한 복수를 하고 이들을 몰아내어 서인이 조정의 권력을 잡아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고자 배후에서 조정하고 송강 정철에 의해 실행으로 옮겨졌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게 인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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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역사 스페셜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 정여립의 난”
김장생(金長生)의 〈송강행록 松江行錄>, 국역 조선왕조 실록, 동소만록, 동남소사, 연려실 기술
[참고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 ‘조선조의 광주사태’, 기축옥사의 재조명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인터넷]
민족문화추진회 http://www.minchu.or.kr
※파주의 구봉 송익필의 고향에 세워진 구봉의 유허비는 봉우 권태훈 옹이 세운 것이다. 그는 생전에도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의 삼전생은 구봉 송익필의 동생인 운곡 송한필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듯이, 운곡 송한필의 후신(後身)으로 온 봉우 권태훈 옹이 삼전생의 형에 대한 추모와 그리움의 뜻으로 비를 세운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봉우 권태훈 옹은 삼전생의 인연때문이었는지 당진에 있는 구봉의 묘소에도 찾아가 참배하고 그 근방에 살고 있는 구봉의 후손들을 찾아 위로하기도 했었다.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別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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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돈후의 아들인 안당(安瑭)과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 등의 자손들을 말한다. 송사련의 어머니 감정이 안돈후의 천첩(賤妾) 소생으로서 안당의 서매(庶妹)가 되고, 따라서 송사련 역시 안처겸과 고종 사촌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안씨 집에서 송사련을 친근하게 대하면서 보살펴 주었는데, 송사련이 출세할 목적으로 안당의 반대파인 심정(沈貞)ㆍ남곤(南袞) 등에게 빌붙어, 중종(中宗) 16년(1521)에 안당과 안처겸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조작하여 고변(告變)한 결과, 안당ㆍ안처겸 등 안씨 일문(一門)이 화를 당하고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신사무옥이 일어났다. 그 뒤 선조(宣祖) 19년(1586)에 안당의 증손인 안로(安璐)가 송사를 일으켜 역모 사건이 조작임이 밝혀지면서, 송익필 형제를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속(還屬)되자,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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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 기술 14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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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한필(宋翰弼)이 황해도에 가서 성명을 고치고 스스로 조(趙)생원이라고 하였다. 밤낮으로 동인(東人)을 원망하여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또 정여립이란 자는 전주 사람인데, 넓게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아서 성현의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문하에 출입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추천하여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가, 서인들이 세력을 잃게 되자 다시 동인에게 붙으니, 이발(李潑)이 받아들였다. 이발은 남평(南平) 사람인데 이때부터 여립과 서로 친하게 되었다. 여립의 사람됨이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어리석고 기운이 과하여 이이(李珥)를 공격하는 데는 못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서인(西人)들은 그를 극히 미워하였고, 비록 동인들 중에서도 역시 후폐가 있을 줄 알고, 혹은 이발에게 절교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발은 인재가 아깝다 하여 듣지 아니하였다.
한필(翰弼)의 무리들이 황해도 땅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서 말하기를,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즉 정수찬(鄭修撰)이다. 길삼봉(吉三峯)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는데, 삼봉은 하루 3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할 데 없으니, 역시 신인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 하였다.
교생(校生)변숭복ㆍ박연령 등 몇 사람이 그 말을 믿고서 여립을 가보니, 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보냈다. 그때에 박충간(朴忠侃)은 재령 군수였고, 이축(李軸)은 안악 군수였고, 한응인(韓應寅)은 신천군수였는데, 충간이 안악에 달려가서 이축에게 말하기를, “여립의 역적 음모가 이미 드러났으니 속히 도모해야겠다.” 하였으나, 이축은 마음이 옹졸하여 심히 어렵게 여겼다. 또 신천에 가보니 응인은 밝은 사람이므로 그 기미를 알고 술을 마시며 거짓 취하는 체 하니 충간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두어 차례 한 뒤에 충간은 드디어 이축을 협박하고 응인을 공갈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여 장계(壯啓)를 올리니, 조정과 민간이 경동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모아 이르기를, “내가 여립의 위인을 아나 어찌 역적에까지 이르겠는가.” 하니, 좌의정 정언신이 약간 냉소하며 아뢰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나 잡아다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비록 서인들이라도 다 말 하기를. “여립이 마음씨는 부정할망정 어찌 반역 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에 역적 모의에 참가했다는 백성 두어 사람을 한준(韓準)이 잡아 큰 칼을 씌워서 서울로 압송해 보냈는데 임금이 직접 국문을 하니, 모두 빌어먹는 곤궁한 백성들이었다. 임금이 웃으며 이르기를, “여립이 비록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어찌 이런 무리와 공모하겠는가” 하고,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이 반역을 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반역하는 것은 모르나 반국(叛國)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반국은 무슨 뜻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 사건이 실상이 없으므로 곧 놓아 보내려고 여립이 잡혀 오기만 기다렸다. 여립은 진안(鎭安)군 죽도(竹島) 별장에 도망쳤다가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변승복은 여립의 시체 옆에서 역시 목을 찔러 죽었다. 《동소만록(桐巢漫錄)》에는, “여립이 진안군 죽도 절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宣傳官)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 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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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신시기군 자시기부 비일조일석지고
其所由來者 漸矣 由辯之不早辯也
기소유래자 점의 유변지부조변야
易曰履霜堅氷至 蓋言順也 (順:愼)
역왈리상견빙지 개언순야
[번역]
선(善)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慶事)가 있고, 악업(惡業)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災殃)이 따른다.
신하(臣下)가 그 군주(君主)를 살해(殺害)하고, 자식이 그 부모를 죽이는 일은 하루아침 하루 저녁의 연고(緣故)가 아니다.
그 유래는 오래 전부터 쌓여온 것이니, 분별하여야 할 때 일찍이 분별하지 못한 데에 유래가 있다.
역(易)에 이르기를 서리도 밟으면 마침내 얼음에 이르게 되니, 모든 일은 신중하게 순리(順理)를 따라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이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남곤을 중심으로 한 훈구공신들의 모략에 의해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와 같은 젊은 개혁적인 신진사료들이 대거 숙청을 당하자, 조정은 다시 훈구공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왕권(王權)은 훈구공신들에 의해 휘둘리게 되었다. 신진사료들의 처형을 말류하던 안당은 기묘사화 이후 곧 파직되었으며 중종16년에는 “나라를 그르친 간사한 수괴”로 까지 몰려 관직까지 삭탈 당하였다. 이것이 훗날 신사사화를 거쳐 기축옥사가 발발하는 불씨가 되었다.
안당의 집안에는 송사련(宋祀連)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안당의 얼매(孼妹)의 아들로써 안당과는 외삼촌 지간이었으며 훗날 서인의 거두가 된 구봉 송익필의 부친이다. 송사련은 재간이 많고 총명하여 안씨가의 신애를 받아 집안의 대소사를 위임받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1521년 중종16년에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친구들과 당시의 훈구세력들을 제거하면 선비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성토했는데, 송사련은 이것을 빌미로 잡아 처조카인 정상과 함께 안당, 안처겸(안당의 아들) 등이 남곤, 심정 등의 훈구공신들을 제거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신진사림들을 옹호하고자 했던 안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남곤과 심정은 이것을 “모역”으로 부풀려 신사무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안씨일가는 몰락하게 되었으며, 송사련은 그 공로로 정3품의 당상관에 오르게 되었고 안씨 집안의 노비와 전답을 차지했으며 이후 30년간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신사무옥의 공신인 송사련은 5남1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서자(庶子)인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과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은 학문과 도학에 매우 뛰어나 그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다. 율곡 이이도 말하기를 “성리학을 논할만한 사람은 익필과 한필 형제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학문은 매우 뛰어났다고 전한다. 또한 구봉 송익필은 이산해와 더불어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 또한 많았다. 또한 구봉의 탁월한 능력과 재주로 인해 서인의 거두로 일컬어졌으며 서인모주(西人謀主)라는 세평이 있을 정도로 그는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과 재량이 뛰어남에도 전날 그의 아버지인 송사련의 간사함이 훗날 구봉과 운곡을 비롯한 그들 집안의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선조19년 동인에 의해 안당,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지면서 송사련의 관직이 삭탈되고 안당의 손자인 윤의 상소와 동인들의 공세로 인해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를 비롯한 그의 일가 70여명은 종의 신분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동인들이 안당의 아버지인 안돈후의 서녀(庶女)로만 알려졌던 송익필의 외할머니가 안돈후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가 아니라, 종이었던 전남편의 소생이라고 주장하며 종의 자식이니 송익필의 일가를 환천(還賤)해 달라고 상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법전(法典)에는 종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도망 후 60년이 지나면 환천(還賤)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상소로 이미 60년이 훨씬 지난 외조모의 출생에 대한 논란의 결과 종의 신분이 된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는 동인들에 대한 혈원(血怨)의 한(恨)을 품었을 것이다.
졸지에 종의 신분으로 전락한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 형제는 안씨집안의 복수를 피해 집안이 뿔뿔히 흩어져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하던 중 동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한 모략을 꾸미게 된다. 당시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이 전라도에서 대동계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것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는 전라도에서 역모를 위한 군사가 조련되고 있다는 소문이 황해도에서 퍼지도록 하였고, 이것이 황해도 관찰사의 상소로 조정에 알려지면서 서인들은 동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기축옥사가 발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동인들에 의해 4번이나 낙향을 했던 서인측의 정철이 중심이 되어 선두에서 지휘하여 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었거나 서신을 교류한적이 있는 동인은 물론, 연루자와 이름이 비슷한 사람까지 처형을 하는 등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되어 1000여명이 희생된 조선최대의 사화가 되었다.
그러나 기축옥사로 서인들이 조정의 주도세력이 되어 동인들을 일망타진하는 데에는 성공을 했지만, 수 많은 조정신료들의 죽음으로 인해 조정은 황폐화 되었으며, 3년 뒤 전란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했던 조선은 왜군에게 국토를 침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결국 개인의 복수심과 결합된 당파싸움이 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으며 조선을 황폐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기축옥사의 배후 인물이었던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 형제 역시 복수는 했지만 끝내 신분은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떠돌아 다니다 한(恨)을 품은 채 객사하였다고 전한다. 구봉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제자였던 김장생이 수습하여 현재의 충남 당진군 원당면 안골이라는 곳에 장사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고향인 파주에는 현재 그를 추모하는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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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대동계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당시 정여립의 사상과 언동이 급진적이기는 했지만 그의 대동계는 장차 닥쳐올 전란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를 조련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의혹이 있다.
김장생의 <송강행록>에는 황해도에서 상소가 올라와 조정이 어수선할 때 동인들은 정여립이 상경하여 변명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정철은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훗날 쓰여진 <동소만록>에는 기축옥사에 대해 “기축옥은 송익필이 뒤에서 조종하고 정철이 이를 성사시켰다”고 전하고 있으며, <동남소사>에는 “변성명한 송익필이 황해도에서 복술가로 가장하여 향방토호로서 허세가 있는 자들에게 전라도의 정씨 성 가진 사람이 천명을 받았는데, 그와 사귀면 부귀를 누린다” 고 소문을 내어 그들로 하여금 정여립에게 달려가도록 유도했다고 전한다.
현재에도 기축옥사의 배후에 대해서는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구봉 송익필과 운곡 송한필 형제가 자신의 집안을 노비로 전락시킨 동인(東人)에 대한 복수를 하고 이들을 몰아내어 서인이 조정의 권력을 잡아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고자 배후에서 조정하고 송강 정철에 의해 실행으로 옮겨졌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게 인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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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KBS 역사 스페셜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 정여립의 난”
김장생(金長生)의 〈송강행록 松江行錄>, 국역 조선왕조 실록, 동소만록, 동남소사, 연려실 기술
[참고서적]
지워진 이름 정여립 ‘조선조의 광주사태’, 기축옥사의 재조명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인터넷]
민족문화추진회 http://www.minchu.or.kr
※파주의 구봉 송익필의 고향에 세워진 구봉의 유허비는 봉우 권태훈 옹이 세운 것이다. 그는 생전에도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의 삼전생은 구봉 송익필의 동생인 운곡 송한필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듯이, 운곡 송한필의 후신(後身)으로 온 봉우 권태훈 옹이 삼전생의 형에 대한 추모와 그리움의 뜻으로 비를 세운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봉우 권태훈 옹은 삼전생의 인연때문이었는지 당진에 있는 구봉의 묘소에도 찾아가 참배하고 그 근방에 살고 있는 구봉의 후손들을 찾아 위로하기도 했었다.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別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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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돈후의 아들인 안당(安瑭)과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 등의 자손들을 말한다. 송사련의 어머니 감정이 안돈후의 천첩(賤妾) 소생으로서 안당의 서매(庶妹)가 되고, 따라서 송사련 역시 안처겸과 고종 사촌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안씨 집에서 송사련을 친근하게 대하면서 보살펴 주었는데, 송사련이 출세할 목적으로 안당의 반대파인 심정(沈貞)ㆍ남곤(南袞) 등에게 빌붙어, 중종(中宗) 16년(1521)에 안당과 안처겸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조작하여 고변(告變)한 결과, 안당ㆍ안처겸 등 안씨 일문(一門)이 화를 당하고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신사무옥이 일어났다. 그 뒤 선조(宣祖) 19년(1586)에 안당의 증손인 안로(安璐)가 송사를 일으켜 역모 사건이 조작임이 밝혀지면서, 송익필 형제를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속(還屬)되자,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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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 기술 14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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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한필(宋翰弼)이 황해도에 가서 성명을 고치고 스스로 조(趙)생원이라고 하였다. 밤낮으로 동인(東人)을 원망하여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또 정여립이란 자는 전주 사람인데, 넓게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아서 성현의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문하에 출입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추천하여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가, 서인들이 세력을 잃게 되자 다시 동인에게 붙으니, 이발(李潑)이 받아들였다. 이발은 남평(南平) 사람인데 이때부터 여립과 서로 친하게 되었다. 여립의 사람됨이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어리석고 기운이 과하여 이이(李珥)를 공격하는 데는 못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서인(西人)들은 그를 극히 미워하였고, 비록 동인들 중에서도 역시 후폐가 있을 줄 알고, 혹은 이발에게 절교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발은 인재가 아깝다 하여 듣지 아니하였다.
한필(翰弼)의 무리들이 황해도 땅에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서 말하기를,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즉 정수찬(鄭修撰)이다. 길삼봉(吉三峯)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는데, 삼봉은 하루 3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할 데 없으니, 역시 신인이다. 너희들이 만일 가서 볼 것 같으면 벼슬이 스스로 올 것이다.” 하였다.
교생(校生)변숭복ㆍ박연령 등 몇 사람이 그 말을 믿고서 여립을 가보니, 여립도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보냈다. 그때에 박충간(朴忠侃)은 재령 군수였고, 이축(李軸)은 안악 군수였고, 한응인(韓應寅)은 신천군수였는데, 충간이 안악에 달려가서 이축에게 말하기를, “여립의 역적 음모가 이미 드러났으니 속히 도모해야겠다.” 하였으나, 이축은 마음이 옹졸하여 심히 어렵게 여겼다. 또 신천에 가보니 응인은 밝은 사람이므로 그 기미를 알고 술을 마시며 거짓 취하는 체 하니 충간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두어 차례 한 뒤에 충간은 드디어 이축을 협박하고 응인을 공갈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여 장계(壯啓)를 올리니, 조정과 민간이 경동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모아 이르기를, “내가 여립의 위인을 아나 어찌 역적에까지 이르겠는가.” 하니, 좌의정 정언신이 약간 냉소하며 아뢰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나 잡아다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비록 서인들이라도 다 말 하기를. “여립이 마음씨는 부정할망정 어찌 반역 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에 역적 모의에 참가했다는 백성 두어 사람을 한준(韓準)이 잡아 큰 칼을 씌워서 서울로 압송해 보냈는데 임금이 직접 국문을 하니, 모두 빌어먹는 곤궁한 백성들이었다. 임금이 웃으며 이르기를, “여립이 비록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어찌 이런 무리와 공모하겠는가” 하고,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들이 반역을 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반역하는 것은 모르나 반국(叛國)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반국은 무슨 뜻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 사건이 실상이 없으므로 곧 놓아 보내려고 여립이 잡혀 오기만 기다렸다. 여립은 진안(鎭安)군 죽도(竹島) 별장에 도망쳤다가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변승복은 여립의 시체 옆에서 역시 목을 찔러 죽었다. 《동소만록(桐巢漫錄)》에는, “여립이 진안군 죽도 절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宣傳官)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 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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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신시기군 자시기부 비일조일석지고
其所由來者 漸矣 由辯之不早辯也
기소유래자 점의 유변지부조변야
易曰履霜堅氷至 蓋言順也 (順:愼)
역왈리상견빙지 개언순야
[번역]
선(善)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慶事)가 있고, 악업(惡業)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災殃)이 따른다.
신하(臣下)가 그 군주(君主)를 살해(殺害)하고, 자식이 그 부모를 죽이는 일은 하루아침 하루 저녁의 연고(緣故)가 아니다.
그 유래는 오래 전부터 쌓여온 것이니, 분별하여야 할 때 일찍이 분별하지 못한 데에 유래가 있다.
역(易)에 이르기를 서리도 밟으면 마침내 얼음에 이르게 되니, 모든 일은 신중하게 순리(順理)를 따라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이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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