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의 탄생과정
일반적으로 노자와 석가와 공자에 의해서 유불선(儒佛仙)이 탄생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성현들은 각 종교를 스스로 직접 창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하여 체계가 정립되면서 이 분들을 교종(敎宗)으로 하여 각 종교가 성립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창기의 모습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변모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이 분들의 가르침은 유불선(儒佛仙)에서 각기 위정자들의 정치적 목적이나 사회환경에 따라 경전의 해석이나 종교의 운용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종교들이 지금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삼교합일(三敎合一)
불교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유교에서는 심종(心宗)과 교종(敎宗)으로 구분하고 있다.
불교의 교종(敎宗)은 불경(佛經)의 연구와 강론을 주로하며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 진리란 말이나 문자로 표현될 수 없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의 진정한 가르침은 마음을 통해서 전해진다), 직지인심(直指人心 :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난 마음가짐), 견성성불(見性成佛 : 본래의 마음을 발견할 때 부처가 된다.) 등 네 표어에 집약적으로 나타나있듯이 경전해석이 아닌 수행을 강조한다.
유교에서의 교종은 유가(儒家)의 경전을 공부하는 방법을 말하며 현재에 있어 유교를 숭상하는 이들은 대부분 경전의 해석에 치우쳐 있는 경향이다. 반면에 심종(心宗)은 조식(調息)수행을 의미하는데 유가에서 심종에 관한 가르침은 거의 실종된 상태인 듯 하다.
각 교(敎)가 달라 보이는 것은 경전의 내용에 있으나 불가(佛家)에서의 선승이 수행하여 가는 길이나 유가(儒家)에서 심종(心宗)의 길이나 도가(道家)에서의 수행으로 가서 보고 알게 되는 것은 모두 하나이다.
어느 교(敎)에서이건 우선 삼시충이 제거되고 견성(見性) 혹은 현빈일규(玄牝一竅)라고 하는 초각(初覺)을 얻은 다음에 입정에 들어 삼태극(현빈)을 경험하여 그 곳에서 깨달음이 열리고 그 다음에는 또 하나의 자신의 영적(靈的)인 분신인 원신(元神) 혹은 양신(陽神)을 출태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의 경지는 더욱 깊어진다.
그 이후의 과정을 또 넘으면 더욱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넘고 또 넘으면 해탈 혹은 열반이라고 하는 부처나 신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지구상의 어떠한 종교라 하더라도 정신수행의 과정은 다를 수가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경전의 내용이나 이 또한 용어만 다를 뿐 결국은 한가지 이치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BC 2세기 한(漢)의 무제(武帝)는 유교만을 숭상하도록 하여 유교는 중국 봉건사회의 통치사상이 되었다. BC 1세기에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2세기에 도교 교단이 설립되었다. 이후부터 동양의 사상계는 유·불·선 3가(家)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을 때 유교의 윤리설과 융합할 수 있었고, 도가·현학(玄學)의 개념을 빌려서 불경을 해석할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면서 3교의 합일은 더욱더 사상의 보편적인 추세가 되었다.
3. 불교의 잘못된 방향
석가의 가르침은 수행으로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하려고 머리를 깎은 승려들이 수행은 않고 염불이나 낭송해서 시주나 받고 천도제를 지내주고 보시를 받고 심지어는 무속인들이나 하는 부적을 써주거나 신수를 풀어주는 것까지 승려들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석가가 절을 세워 불사(佛事)를 일으키고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복(祈福)행위를 하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일까. 두 말이 필요 없이 수행으로 얻은 것이 없으니 중생을 제도할 수 없고 돈은 필요하니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기록으로 보더라도 석가가 천도제를 지내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부적을 써 주었다는 기록도 없다. 신도들의 기복(祈福)을 빌어주는 행위를 주로 하는 절이라면 불교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다.
4. 도가(道家)의 잘못된 방향
도가(道家)에서나 불가(佛家)에서나 큰 인물이 나서 수행으로 큰 업적을 이루었다면 후인(後人)은 그 분들을 본받아 더욱 발심(發心)하여 열심히 정진하여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앞서 간 인물들을 칭송하고 자랑하는데만 힘을 쓰고 정작으로 자신들의 수행은 게을리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행이 소중한 것이지 앞선 인물의 숭배가 주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 수행으로 결실을 얻은 분들이 숭배를 받으려고 수행을 하지도 않았다. 숭배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는 스스로 깨달아서 얻는 길이다. 기(氣)를 이용하여 신통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밝히고 밝혀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자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수행은 뒷전이 되고 앞선 분들의 숭배 숭상이 우선이 되고 작은 공부로 얻은 작은 재주로 사람들을 현혹하려하니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5.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노자나 석가나 공자가 세상에 바란 것은 새롭게 깨달음을 얻는 이가 계속 배출되어서 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고 교화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깨달은 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니 그 분들의 가르침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왜곡되고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것들을 바로 잡으려면 기복(祈福)을 들어주기 보다 먼저 그리고 작은 재주로 사람들을 현혹하기에 앞서 좀더 큰 마음을 내어 선각(先覺)이 깨달았던 것을 직접 보고 깨달아서 성현들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왜곡되지 않고 바르게 퍼지도록 하는데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신수행에서는 그 분들이 남긴 어록(語錄)은 필요하지 않다. 직접 가서 보고 스스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현들이 가서 보고 얻은 그 길이 석가나 공자 노자만의 길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며 성심으로 정진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스스로 가서 직접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는 영원하고도 진정한 자유를 얻고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는데 등불이 될 수 있다면 태어난 보람을 이 보다 더 크게 찾을 곳은 없으리라.
일반적으로 노자와 석가와 공자에 의해서 유불선(儒佛仙)이 탄생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성현들은 각 종교를 스스로 직접 창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하여 체계가 정립되면서 이 분들을 교종(敎宗)으로 하여 각 종교가 성립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창기의 모습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변모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이 분들의 가르침은 유불선(儒佛仙)에서 각기 위정자들의 정치적 목적이나 사회환경에 따라 경전의 해석이나 종교의 운용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종교들이 지금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삼교합일(三敎合一)
불교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유교에서는 심종(心宗)과 교종(敎宗)으로 구분하고 있다.
불교의 교종(敎宗)은 불경(佛經)의 연구와 강론을 주로하며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 진리란 말이나 문자로 표현될 수 없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의 진정한 가르침은 마음을 통해서 전해진다), 직지인심(直指人心 :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난 마음가짐), 견성성불(見性成佛 : 본래의 마음을 발견할 때 부처가 된다.) 등 네 표어에 집약적으로 나타나있듯이 경전해석이 아닌 수행을 강조한다.
유교에서의 교종은 유가(儒家)의 경전을 공부하는 방법을 말하며 현재에 있어 유교를 숭상하는 이들은 대부분 경전의 해석에 치우쳐 있는 경향이다. 반면에 심종(心宗)은 조식(調息)수행을 의미하는데 유가에서 심종에 관한 가르침은 거의 실종된 상태인 듯 하다.
각 교(敎)가 달라 보이는 것은 경전의 내용에 있으나 불가(佛家)에서의 선승이 수행하여 가는 길이나 유가(儒家)에서 심종(心宗)의 길이나 도가(道家)에서의 수행으로 가서 보고 알게 되는 것은 모두 하나이다.
어느 교(敎)에서이건 우선 삼시충이 제거되고 견성(見性) 혹은 현빈일규(玄牝一竅)라고 하는 초각(初覺)을 얻은 다음에 입정에 들어 삼태극(현빈)을 경험하여 그 곳에서 깨달음이 열리고 그 다음에는 또 하나의 자신의 영적(靈的)인 분신인 원신(元神) 혹은 양신(陽神)을 출태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깨달음의 경지는 더욱 깊어진다.
그 이후의 과정을 또 넘으면 더욱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넘고 또 넘으면 해탈 혹은 열반이라고 하는 부처나 신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지구상의 어떠한 종교라 하더라도 정신수행의 과정은 다를 수가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경전의 내용이나 이 또한 용어만 다를 뿐 결국은 한가지 이치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BC 2세기 한(漢)의 무제(武帝)는 유교만을 숭상하도록 하여 유교는 중국 봉건사회의 통치사상이 되었다. BC 1세기에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2세기에 도교 교단이 설립되었다. 이후부터 동양의 사상계는 유·불·선 3가(家)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을 때 유교의 윤리설과 융합할 수 있었고, 도가·현학(玄學)의 개념을 빌려서 불경을 해석할 수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면서 3교의 합일은 더욱더 사상의 보편적인 추세가 되었다.
3. 불교의 잘못된 방향
석가의 가르침은 수행으로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하려고 머리를 깎은 승려들이 수행은 않고 염불이나 낭송해서 시주나 받고 천도제를 지내주고 보시를 받고 심지어는 무속인들이나 하는 부적을 써주거나 신수를 풀어주는 것까지 승려들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석가가 절을 세워 불사(佛事)를 일으키고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복(祈福)행위를 하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일까. 두 말이 필요 없이 수행으로 얻은 것이 없으니 중생을 제도할 수 없고 돈은 필요하니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기록으로 보더라도 석가가 천도제를 지내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부적을 써 주었다는 기록도 없다. 신도들의 기복(祈福)을 빌어주는 행위를 주로 하는 절이라면 불교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다.
4. 도가(道家)의 잘못된 방향
도가(道家)에서나 불가(佛家)에서나 큰 인물이 나서 수행으로 큰 업적을 이루었다면 후인(後人)은 그 분들을 본받아 더욱 발심(發心)하여 열심히 정진하여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앞서 간 인물들을 칭송하고 자랑하는데만 힘을 쓰고 정작으로 자신들의 수행은 게을리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행이 소중한 것이지 앞선 인물의 숭배가 주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 수행으로 결실을 얻은 분들이 숭배를 받으려고 수행을 하지도 않았다. 숭배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는 스스로 깨달아서 얻는 길이다. 기(氣)를 이용하여 신통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밝히고 밝혀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자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수행은 뒷전이 되고 앞선 분들의 숭배 숭상이 우선이 되고 작은 공부로 얻은 작은 재주로 사람들을 현혹하려하니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5.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노자나 석가나 공자가 세상에 바란 것은 새롭게 깨달음을 얻는 이가 계속 배출되어서 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고 교화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깨달은 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니 그 분들의 가르침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왜곡되고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것들을 바로 잡으려면 기복(祈福)을 들어주기 보다 먼저 그리고 작은 재주로 사람들을 현혹하기에 앞서 좀더 큰 마음을 내어 선각(先覺)이 깨달았던 것을 직접 보고 깨달아서 성현들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왜곡되지 않고 바르게 퍼지도록 하는데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신수행에서는 그 분들이 남긴 어록(語錄)은 필요하지 않다. 직접 가서 보고 스스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현들이 가서 보고 얻은 그 길이 석가나 공자 노자만의 길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며 성심으로 정진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스스로 가서 직접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는 영원하고도 진정한 자유를 얻고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는데 등불이 될 수 있다면 태어난 보람을 이 보다 더 크게 찾을 곳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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